얼마 전 정교회의 한 관계자는 “정교회가 1917년 혁명을 '대혁명(大革命)'으로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러시아 정교회의 수장 키릴 총대주교는 혁명을 '대죄(大罪)'라고 명명하며 당시 사건들을 재평가했다.

키릴 총대주교의 발언은 혁명의 결과, 특히 내전 발발과 레닌주의자들의 전투적인 반(反)교권주의 같은, 1917년10월 볼셰비키의 정권 장악 후에 일어난 일련의 사태를 염두에 두고 나왔다. 이러한 반교권주의로 인해 성직자들의 대대적인 몰락이 이어졌고 성당들은 파괴되었다.

그런데 혁명을 시작한 세력은 볼셰비키들이 아니었다. 황제 니콜라이 2세를 퇴위시킨 주체는 당시 러시아의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2월 말 일어났던 민중 봉기다. 들끓어 오르던 혁명의 기운과 정권의 끊임없는 위기상황이 10월 혁명에 앞서 몇 달간이나 지속되었다.

키릴 총대주교는 자신의 발언에서 황제의 퇴위만 언급했다. 2월 혁명이 진행되던 그때 정교회가 군주제 수호를 위한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음에도 대주교는 그런 상황은 거론하지 않았다. 정교회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임시정부를 지지했다. 나라를 위기로부터 구하기에는 치명적일 정도로 무능했다고 지금의 대주교가 ‘올바로’ 비판하고 있는 바로 그 정권이다. 그 결과 볼셰비키가 권력을 쟁취하게 되었다.

“다른 길은 없었다”

당시 상황에서 정교회가 다른 태도를 취할 수는 없었다는 의견도 있다. 페트로그라드에서의 혁명 승리는 급작스러운 일이었다. 2월 26일에도 정부가 수도를 통제하고 있다고들 생각했으나 바로 다음 날 페트로그라드는 봉기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당시 정교회가 형식적으로나마 지켜야 할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는 지적도 있다. 3월 2일 이미 니콜라이 2세는 동생 미하일 대공에게 왕위를 넘겨주기 위해 권좌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미하일은 제헌의회의 승인을 받은 뒤 제위에 오르겠다는 조건을 내건다.

모스크바국립대학교 역사학과의 표도르 가이다 교수는 Russia포커스와의 인터뷰에서 “본질상 독립기관이 아니고 행정 부처와 유사한 조직이면서 국가시스템의 일부였던 정교회가 페트로그라드 개혁 이후 다른 행정부처들과 똑같이 행동했다”고 말했다.

정교회는 처음엔 사태에 그리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혁명 세력이 급작스럽게 승리하자 종무원(시노드)은 다른 행정부처들과 같은 태도를 보이며 새로운 정권을 인정했다. 가이다 교수는 “종무원의 행보를 좌우했던 논리는 국가체제의 붕괴와 내전을 막자는 것이었다. 단 하나의 선택이 이 문제의 해법이 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임시 정부를 인정하는 길이었다”고 지적한다. 만약 정교회가 당시 이 길을 택하지 않았다면 전제 체제를 타도하고 권력을 장악한 이들에게 '정치적 박해'를 받았을 것이다. 당시 정세에서 종무원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가이다 교수는 강조한다.

임시 정부의 장수를 기원

한편, 이런 접근방식에 이견을 제시하는 이들은 “종무원이 페트로그라드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태에 냉정한 태도를 보였고 황제를 일부러 돕지 않았다”고 비난한다.

니콜라이 제바호프 부종무원장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2월 26일 신도들에게 보내는 격문을 쓰자고 종무원의 사제장에게 제안했다’고 밝혔다. 격문을 썼더라면 '교회가 설파하는 준엄한 경고에 불순종하는 자는 교회가 내리는 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내용을 담았을 것이다. 하지만 종무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종무원이 비난의 화살을 받는 이유는 황제 수호에 소극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권력을 서둘러 인정했기 때문이다. 정교회 주교들은 황제가 퇴위한 날인 3월 2일 바로 임시정부와 관계를 형성한다. 그런 다음 종무원은 새로운 정권이 임명한 종무원장을 받아들였고, 혁명 이후 처음 개최된 3월 4일 자 회의에서 종무원 임원들은 “러시아 정교회에 '새 시대'가 도래했음을 기쁘게 환영한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뿐만 아니다. 제바호프 부종무원장이 회고록에서 밝힌 내용에 따르면, 신임 종무원장은 정교회의 한 주교와 함께 상징적인 행위로 황제의 의자를 회의실 밖으로 들어냈다. 황제의 자리를 치우는 행위에 감상적인 언사도 동반되었다.

3월 9일 종무원은 ‘임시정부에 신뢰를 보내야 한다’고 호소하는 교서를 발표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정교회 특별위원회는 모든 미사 전서에서 황제가 언급된 내용을 말끔히 지워버린다. 황제가 언급되었던 자리에 '참된 신앙을 고백하는 임시정부'를 위한 기도문이 등장했고, 그 내용은 새로운 정권의 장수를 기원하는 것이었다.

교회가 황제에 대항할 수 있었나?

미하일 밥킨 국립러시아인문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는 “천 년에 걸친 황제 권력과의 연결고리를 정교회가 의식적으로 끊어버렸다”고 말한다. 밥킨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국가의 최고 권력자가 황제냐, 사제장이냐를 놓고 수 세기 동안 이어진 논쟁을 자신들이 유리한 쪽으로 해결할 가능성을 정교회가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밥킨 교수는 이러한 판단에 근거하여 “성직자들이 러시아 군주제 종식에 또 하나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결론 내린다. 현재 정교회 주교들은 '2월 혁명 이후의 시기에 최고 성직자들의 정치적 입장'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한다. 교수는 “당시의 정치적 입장이 국가주의와 전통주의로 대표되는 지금의 정교회가 취하는 태도에 별로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Russia포커스와의 인터뷰에서 말한다.

Russia포커스와의 인터뷰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바흐탕 킵시드제 사회언론대응과 과장은 밥킨 교수의 의견을 논평하면서 표도르 가이다 역사학과 교수가 주장하는 논거를 많이 활용했다. 킵시드제 과장은 러시아제국 시절 세속 행정 기관 중 하나와 같은 정교회의 실질적 지위를 언급하면서 “당시에 정교회가 어떤 식으로든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강조했다.

정교회가 군주제 타도를 위해 혁명세력들과 동조하려 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면서 모스크바 총대주교 대변인은 “같은 국민의 대립을 부추기고 동족상잔의 비극, 전쟁, 혁명을 심화시키는 그 어떤 것에도 교회가 지지를 보낸 적은 결코 한 번도 없었다”면서 러시아 정교회가 취하는 기본 원칙을 강조했다. 러시아 정교회는 키릴 총대주교가 혁명과 관련하여 '대죄'라고 한 발언은 전제 정치 타도부터 시작하여 당시에 일어났던 모든 혁명적 사건들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뜻도 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