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노프 황가 살해 수사 새로 시작된 이유

니콜라이 2세를 그리는 성상.

니콜라이 2세를 그리는 성상.

AP
공식 보도에 따르면, 황제 니콜라이 2세의 가족은 살해됐다. 하지만 이들이 살해된 1918년 7월17일 새벽은 지금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전설에 싸여 있다. 이들 중 누군가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을까? 수사는 지금도 종결되지 않았다. Russia포커스가 로마노프 황가 살해를 둘러싼 가장 중요한 의문점들에 대해 답해 보았다.

유해는 어떻게 발견됐나?

황가의 다섯 식구와 시종들의 유해는 1991년에야 예카테린부르크 부근에서 발견됐다. 하지만 알렉세이 황태자와 마리야 황녀의 유해는 이들 사이에 없었다. 발견된 유해를 둘러싼 전문가들의 견해는 엇갈렸다. 일각에서는 발견된 유해가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유해라고 말했지만, 다른 일각에서는 이를 부정했다. 러시아 대검찰청은 유해의 신원확인을 위한 수사를 진행했다. 이후 유해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페트로파블롭스키 성당에 안치됐다.

왜 지금 수사를 재개했나?

1991년 발견되지 않았던 황태자 알렉세이와 황녀 마리야의 유해는 2007년 발견됐다. 그 이후로 이들의 유해는 러시아국립문서보관소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다른 가족들이 안치되어 있는 페트로파블롭스키 성당으로 이들의 유해를 이장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지난 11월 말 이 사건은 특수사건수사국으로 이관됐고 추가적인 유전자 비교감식을 위하여 황제 알렉산드르 3세의 유해를 발굴하기도 했다.

니콜라이 2세의 가족 (사진제공=게티 이미지)니콜라이 2세의 가족 (사진제공=게티 이미지)

과거에는 누가 수사를 담당했나?

수사는 심지어 두 차례나 진행됐다. 처음에는 백군 소속의 나메트킨과 세르게예프, 소콜로프 수사관이 수사를 맡았다. 소콜로프는 수사에서 핵심 역할을 담당한 자료를 가장 많이 수집했다. 두 번째 수사는 1993년에 시작됐으며, 당시 러시아 대검찰청장이 직접 이 사건을 형사기소했다.

러시아 법은 계획적 살인에 공소시효를 두고 있지 않다. 덕분에 황가 살해 수사가 시작될 수 있었다.

새로운 수사는 러시아정교회에 왜 중요할까?

2000년 러시아정교회는 니콜라이 2세 일가를 성인으로 추대했고, 이들은 현재 러시아에서 ‘황실 순교자’로 숭배되고 있다. 페트로파블롭스키 성당에 안장된 유해의 신원에 오류가 없어야 하는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정교회는 ‘예카테린부르크 유해’가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유해라는 데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인 역사학자 베니아민 알렉세예프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알렉세예프는 어떤 근거로 의문을 제기하나?

알렉세예프는 공식 발표된 총살 일자 이후에 황녀들에게 점심식사를 갖다 주곤 했다고 주장하는 식당 종업원의 증언을 근거로 제시했다.

이 밖에 소콜로프 수사관의 문서보관소에 담겨 있는 정보에 따르면, 니콜라이 2세 일가 처형 이후 볼셰비키 지도부는 ‘황실가족 생명 보전’을 두고 독일 외교관들과 협상을 벌였다는 것이다.

알렉세예프는 또한 올가 황녀의 대부였던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1941년까지 그녀에게 연금을 주었다는 외국 역사학자들의 말을 인용했다.

황태자 알렉세이와 황녀 마리야의 유해 발굴 과정에서 이들의 유골과 함께 1930년 발행 동전들이 발견됐다는 점도 고민해보아야 하는 대목이다.

알렉세예프의 실수는 아닐까?

많은 사람이 그가 틀렸다고 생각한다. 아직까지 그의 모든 주장에 반론이 나오고 있다. 식당 종업원은 ‘백군의 수사’를 일부러 교란시킨 것이며, 볼셰비키는 황실 일가의 처형 사실을 숨기기 위해 협상을 계속했으며, 1930년 발행 동전은 나중에 땅속에 묻힌 것이라는 것이다.

황가의 다섯 식구와 시종들의 유해는 예카테린부르크 부근에서 발견됐다. (사진재공=AP)황가의 다섯 식구와 시종들의 유해는 예카테린부르크 부근에서 발견됐다. (사진재공=AP)

황가 중 일부가 살아 남을 수 있었을까?

황가의 생존설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매장이 혁명 이후 소비에트 당국이 꾸며낸 사기극이었고, 황가 전체 또는 일부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한때 안나 앤더슨이라는 미국인이 자신이 아나스타시야 황녀라고 밝혔는데, 니콜라이 2세의 사촌동생 안드레이 대공이 그녀의 손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다른 로마노프 황실 사람들은 ‘로마노프가 성명’을 발표하고 앤더슨과의 친족 관계를 부인했다.

사칭자들은 더 있었나?

사칭자는 최소 230명이었다. 아나스타시야를 사칭한 사람은 34명, 마리야는 53명, 타티야나는 33명, 올가는 28명이었다. 황태자 알렉세이 사칭자가 81명으로 가장 많았다. 심지어 존재하지도 않았던 황제의 딸 알렉산드라와 이리나를 사칭한 여자도 두 명 있었다.

사칭자들은 무엇을 노렸나?

유럽 여러 은행들에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예금이 남아 있다고 알려졌다. 사칭자들이 노렸던 것도 바로 그 예금이었다. 안나 앤더슨은 약 40년간 은행들을 상대로 소송을 벌였지만, 결국 패소하고 말했다.

article.crosslink.title

This website uses cookies. Click here to find out more.

Accept cook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