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테르부르크의 거리들은 축제 분위기였다. 행인들은 멈춰 서서 행복한 표정으로 서로 축하의 말을 건넸고 지인들만 아니라 남들에게도 인사를 했다... 온 도시의 교회들에서는 감사 미사가 열렸고 극장마다 관객들은 애국가 연주를 요구했으며 재연주를 뜨겁게 요청했다.” 이 모습은 전쟁 승리나 종전을 축하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 아니다. 1916년 12월 17일(신력 12월 31일)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부르크는 그리고리 라스푸틴 ‘장로’(존경 받는 수도승들의 예를 따라 그를 이렇게 불렀다)가 귀족 그룹에 의해 간밤에 살해됐다는 뉴스에 크게 환호했다.

이보다 약 10년 전 반문맹의 정교회 신자인 시베리아 농민 한 명이 페테르부르크에 나타났을 때 그의 말이 국가의 중대한 결정을 채택하는 데서 핵심이 되고 그를 향한 증오가 최고에 이르게 되리라고 예상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특별한 정신적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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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푸틴이 1904~05년 무렵 페테르부르크에 나타났을 때 이미 그는 여러 수도원과 성지로 순례를 다녀온 종교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비범한 능력의 소유자로 병자를 치료할 수 있었다고 한다.

페테르부르크에서 그에게 관심을 보인 사람들 가운데에는 영향력 있는 교회 활동가가 많았는데, 그중에는 황실의 정신적 자문역을 맡고 있던 페오판 대주교도 있었다. 일설에 따르면, 황후 알렉산드르 표도로브나와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라스푸틴을 소개한 사람이 바로 페오판 대주교였다.

라스푸틴은 페오판 대주교에게 그랬던 것처럼 당시 종교계 명망가들에게 좋은 인상을 강하게 심어줬다.

교회사학자인 게오르기 미트로파노프는 “라스푸틴이 모험가가 아니라 특별한 세계관과 정신적 능력을 실제로 겸비한 사람이었다”고 확신 있게 말했다.

치료자 라스푸틴

로마노프 공주들과 라스푸틴. 기록 사진로마노프 공주들과 라스푸틴. 기록 사진황실에 들어간 라스푸틴은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황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이는 그녀와 니콜라이 황제 사이에서 독자로 태어난 황태자 알렉세이의 병과 관련돼 있었다. 알렉세이는 혈우병이라는 무서운 병을 앓고 있었다.

많은 증언에 따르면, 의사들이 병세가 나쁜 알렉세이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을 때 라스푸틴이 도움을 줬다고 한다. 보렌 이옌이 자신의 책 ‘마지막 대공비’에서 인용하고 있는 대공비 올가 알렉산드로브나의 말에 따르면, 라스푸틴의 개입은 실제로 알렉세이에게 좋은 영향을 끼쳤다. 평소 대공비가 라스푸틴 ‘장로’에게 부정적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녀의 이런 말은 특히 의미심장하다.

죄와 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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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과의 가까운 관계(라스푸틴은 황후를 ‘마마’로, 황제를 ‘파파’로 불렀다)는 반문맹의 시베리아 농촌 출신 ‘라스푸틴’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학자이자 문학자인 알렉세이 바를라모프가 자신의 책 '새로운 그리고리 라스푸틴'에서 쓰고 있듯이, 라스푸틴은 동궁 안에 자신의 연줄이 있다고 자랑하기 시작했고 페테르부르크 중심부에 있는 자신의 큰 아파트에서 청탁자들을 받아 이들의 다양한 부탁을 들어줬다. 라스푸틴은 이들의 부탁을 귀 기울여 들었고 누구도 거절하지 않으려고 했으며 사람들이 요청하면 돈을 주었고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주저하지 않고 정부에 있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바를라모프가 전한 일화에 따르면, 라스푸틴은 내무부에 전화를 걸어 전화 받은 관리에게 “알료시카 장관 바꿔 봐”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여기서 라스푸틴이 ‘알료시카’라고 부른 사람은 1915~1916년에 내무부 장관을 지낸 알렉세이 흐보스토프였다.

1910~1911년 무렵 라스푸틴의 삶은 그가 페테부르크에 나타났을 당시 보였던 성자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음주와 방탕에 빠지고 싸움질을 일삼았고 여자들을 유혹했다는 소문이 페테르부르크에 끊이지 않았다. 라스푸틴은 이런 사실을 추궁 받자 변명을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여자들이 먼저 그에게 다가와 가까이 지내려고 했다고 밝혔고 은총은 죄를 통해서만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라스푸틴과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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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장 큰 반향을 낳은 소문은 그와 황후의 관계를 둘러싼 것이었다. ‘그리시카(그리고리란 이름의 애칭인데 라스푸틴을 그렇게 불렀다.)가 황후와 공주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말이 러시아에 돌기 시작했다. “스승님이 내 곁에 앉아 있고 내가 당신 손에 입맞추고 편안한 당신 어깨에 내 머리를 기대고 있을 때만이 영혼의 안식을 느낍니다.” 이 말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가 라스푸틴에게 보낸 친필 편지 가운데 하나에 나오는데, 이들 편지는 1911년 말에 등사되어 페테르부르크에 퍼졌다. 블라디미르 코콥초프 총리는 이들 편지가 “가장 역겨운 가십거리를 제공했다»고 말했지만, 여기에는 “사실상 [황후를 둘러싼] 불가사의한 분위기가 드러나 있었다.”

이들 편지는 교회에서 쫓겨난 수도승 일리오도르가 라스푸틴에게서 받아 갖고 있다가 공개한 것을 추정된다. 일리오도르는 처음에 라스푸틴 ‘장로’의 영향 아래 있었지만, 나중에 그의 가장 악랄한 적 가운데 한 사람으로 돌아서서 그에 관해 '성스러운 악마’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했다. 편지 스캔들 직후 국가두마 의원 가운데 한 사람이 당국에 라스푸틴에 대한 공식 조사를 요청하자 ‘장로’의 이름이 온 나라 신문 지면에 등장했다. 황실의 명성은 또 한 번의 타격을 입었다.

라스푸틴 살해와 황실의 파멸

유수포프 공작. 사진제공: 리아노보스티유수포프 공작. 사진제공: 리아노보스티

라스푸틴으로 하여금 몇 달간 페테르부르크를 떠나 있게 한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향력은 커져만 갔다. 앞서 언급한 알렉세이 흐보스토프 장관과 보리스 시튜르메르 총리는 다른 몇 몇 사람과 마찬가지로 시베리아 출신 '장로' 덕분에 임명됐다.

이는 전혀 비밀이 아니었으며 러시아에 매우 불리하게 돌아가던 1차 세계대전이 계속되는 중에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황후의 독일 혈족들은 배신이 패전 원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회상했다. 러시아 사회는 라스푸틴도 독일 간첩으로 봤다. '장로'의 앞날에 먹구름이 짙어졌다. 바를라모프의 말에 따르면, 마지막 몇 달간 라스푸틴은 그가 예언한 대로 황실을 파멸로 이끌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기라도 한 듯이 특히 술을 많이 마셨다.

종말은 12월 16일 황제의 친척인 펠릭스 유수포프 공작의 집에서 시작됐다. 유수포프 공작은 황실의 명성을 구하는 음모 조직을 조직했다. 그는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과 블라디미르 푸리시케비치 국가두마 의원이 포함된 음모 가담자들과 함께 라스푸틴을 초대했다. 그리고 독이 든 피로그(파이)를 내놨는데 라수푸틴은 이를 모르고 먹었다. 그래도 죽지 않자 가담자들은 총을 몇 발 쐈고 그래도 안 죽자 얼음 구덩이에 빠뜨려 죽였다.

라스푸틴 사망 두 달 후 로마노프 왕조는 막을 내렸다. 알렉산드라 황후와 니콜라이 로마노프 황제는 자녀들과 함께 먼저 시베리아로 이송됐고(도중에 이들은 라스푸틴이 살았던 마을을 지나쳤다), 그런 다음에는 하인들과 함께 예카테린부르크의 한 주택 지하실에서 총살당했다. 총살 이후 로마노프 일가에게서 성상화 57개가 발견됐는데, 그중 3개는 라스푸틴이 선물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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