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과 생존 사이에서... 러시아 장애인들의 삶

율리야 사모일로바

율리야 사모일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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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를 탄 여가수가 사상 처음으로 국제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서 러시아 대표로 출전하기로 하지만 러시아에서 장애인들에 편한 환경을 제공하기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2017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는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서 열린다.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는 회원국 시청자 앞에서 노래, 춤 등 자신의 기량을 뽐낸 뒤 순위를 가리는 유럽 최대의 음악 경연 대회다. 1996년부터 매년 열리는 이 대회는 최대 6억 명의 관객이 시청하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비스포츠 행사 가운데 하나다. 유로비전은 한국과 미국, 캐나다, 이집트, 인도, 레바논,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남아프리카 등 경연에 참가하지 않는 비유럽 국가들에도 중계된다. 2000년부터는 인터넷에서도 중계되고 있다.

2017년 3월 12일 열세 살 때부터 척수근위축 때문에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여가수 율리야 사모일로바가 러시아 대표로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나간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상반된 반응이 나왔다. 논평가들은 하나같이 사모일로바에게 존경을 표했지만, ‘제1채널’ 방송 심사위원단이 사모일로바를 선택한 의도가 무엇인지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어떤 사람들은 장애인 여가수의 참가가 러시아 사회를 좋은 쪽으로 변화시켜주고 포용력 있는 나라로 만들어주는 중요한 상징적 행보라고 평가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사실과 달리 러시아가 장애인들에게 장애물이 없는 나라라는 걸 보여주려는 정치적 게임에 사모일로바가 이용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러시아 내 장애인들을 위한 인프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진행되는  "한계가 없는 아름다움 (Beauty without limits)" 콘테스트에서 참여하는 여성 장애인. 사진제공: 로이터블라디보스토크에서 진행되는 "한계가 없는 아름다움 (Beauty without limits)" 콘테스트에서 참여하는 여성 장애인. 사진제공: 로이터

러시아는 장애인들의 삶을 위한 인프라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당국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2017년 3월 초 유리 차이카 검찰총장은 장애인들의 이동을 위한 인프라가 부재하거나 비참한 상태에 있다고 지적했다.

장애인 자신들도 그들이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는 적어도 그런 환경을 위해 오랫동안 싸워야만 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의 지체 장애인으로 사회단체 ‘장애물 없는 휠체어’ 회원인 막심 니코노프는 “우리 가족은 내가 휠체어를 타고 다닐 수 있도록 사비로 집 현관 입구에 경사로를 설치했다”고 Russia포커스에 이야기했다.

니코노프에 따르면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많이 좋아졌지만(예를 들면, 그가 사는 동네의 상점 대다수가 장애인 시위 이후 경사로를 설치했다), 많은 문제가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장애인들은 지하철을 이용하지 못한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특수 시스템이 있지만, 모든 휠체어에 적합한 것은 아니다.

대도시들에는 장애인들을 위한 인프라가 어느 정도 돼 있지만, 지방은 아주 열악하다. 소도시 키셀룝스크(모스크바에서 3076km)에 사는 지체 장애자인 옐레나는 “장애인들이 대도시들에서만 조금 편리하게 살 수 있다”고 온라인 신문 The Village에 말했다. 옐레나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모스크바에 왔을 때 공항에 휠체어용 리프트가 없어서 사람들이 그녀를 두 팔로 안아 옮겨야 했는데, 어른으로서 창피했다고 한다.

사람들의 태도 문제

러시아에서 장애인들이 겪는 어려움은 물리적인 문제들에 그치지 않는다. 사람들이 장애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몰라서 스캔들이 터지는 일도 자주 있다. 예를 들면, 체복사리 시(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600km) 공항에서 패럴림픽 선수이자 러시아 육상 챔피언인 자미르 시카호프는 자신을 팔로 안아 옮겨주는 것을 거부했다(공항에는 리프트가 없었다). 시카호프는 “나는 수화물이 아니다. 나는 살아 있는 사람이다”라고 화를 내며 두 팔로 트랙을 잡고 내려갔다.

‘타인도 돕고 자신도 돕기’라는 원격 원조 프로젝트의 설립자이자 관리자인 베라 자하로바는 “러시아에서는 장애인들이 대개 사회와 단절되어 집 안에 갇혀 지내고 일반인들은 장애인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고 올바르게 대하는 법을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자하로바는 “장애인들이 일도 하고 산책도 하며 좀 더 적극적으로 생활하면 기뻐할 테지만, 현재의 인프라 문제로 인해 모두가 감히 그렇게 하지는 못한다”고 Russia포커스에 말했다. 공식 자료에 따르면 러시아에는 노동 가능한 장애인이 370만 명 있지만, 그중에서 고용된 사람은 네 명 중 한 명뿐이다.

유럽 수준까지 가려면 아직도 멀어

소년이 모스크바 지하철에서 열차를 기다리는 모습. 사진제공: AP소년이 모스크바 지하철에서 열차를 기다리는 모습. 사진제공: AP

시청각 장애인들을 지원하는 자선기금 ‘소-예디네니예(단결)’의 드미트리 폴리카노프 회장은 장애인 문제를 해결하려면 체계적인 접근방법이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폴리카노프 회장은 “공공장소들에 장애인용 경사로나 화장실만 설치할 게 아니라 지체 부자유자나 시력 장애자가 집에서 나와서 이런 편의시설까지 갈 수 있도록 하는 전체 노선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Russia포커스에 말했다.

이와 함께 사회에서 관용을 발전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폴카노프 회장은 “장애인들을 올바르게 대하는 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치지 않으면 어떤 발전도 없을 것”이라며 “그런데 이런 면에서 일정 부분 진전이 있다”고 평가했다. 2012년부터 학교(한국의 초중고를 포함한 학교)에서는 ‘선행 수업’이 진행되고 있는데, 이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장애인들을 올바르게 대하는 법을 설명해 주고 있다.

지체 장애자인 막심 니코노프의 관찰에 따르면, 사회에 진전이 나타나고 있다. 사람들이 장애인들을 보면 짜증을 덜 내고 그들을 기꺼이 도와주고 있기 때문이다. 니코노프는 “하지만 나는 유럽에 자주 다니면서 러시아가 유럽 수준까지 가려면 아직도 멀었음을 깨닫고 있다”고 지적했다.

>> 정신 질환자들이 진행하는 러시아 유일의 라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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