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의 마지막 역 ‘아스타포보’

(사진제공=윌리엄 브룸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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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 톨스토이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 중 한 명이다. 그의 소설들은 뭇사람의 삶에 기쁨과 지혜를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톨스토이의 만년은 개인적 혼란과 가정 불화로 점철된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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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가을 위대한 작가 톨스토이는 참을 수 없는 가정 상황에서 도망쳐나와 자신의 영지 야스나야 폴라냐가 아니라 모스크바 남쪽으로 약 402킬로미터 떨어진 오늘날 리페츠크로 불리는 지역의 외딴 역 아스타포보(Астапово)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1910년 무렵 아스타포보는 일부 톨스토이의 전기에서 언급된 것처럼 작은 시골역이 결코 아니었다. 그와 정반대로 당시 급속하게 발전하던 러시아 철도망에서도 타 지방역들에 모범이 될 만한 수준의 역이었다. 아스타포보 역은 맨처음 지은 목조 역사와 그 옆에 1903년 추가로 건설된 튼튼한 2층짜리 벽돌건물 등으로 구성된 건물군이었다.

역 뒤편으로는 왼쪽에 벽돌 급수탑 두 개가 서 있는데, 그 크기를 보면 아스타포보 역이 얼마나 급속히 팽창했는지 알 수 있다. 역 단지 뒤에 있는 작은 광장 건너편으로는 멋지게 설계된 철도 노동자용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다. 역단지 건너 편으로는 입구가 있는 공원 하나가 조성되어 있었다. 이것이 톨스토이가 1910년 10월 31일 도착했을 당시 아스타포보 역의 모습이었다(이 날짜는 당시 러시아에서 사용하던 율리유스력에 따른 날짜로 러시아 외 지역에서 사용하던 그레고리력에 따르면 이날은 11월 13일이었다).


확대지도로 본 아스타포보의 모습

만년에 톨스토이는 헌신적인 아내였던 소피야 안드레예브나가 자신의 사회적·도덕적 견해에 공감하지 않는다고 느끼자 점점 미칠 지경이었다. 이러한 비극적 불화는 톨스토이로 하여금 야스나야 폴랴나를 떠나게 하는 등 작가의 공적 행보를 부추긴 그의 일부 측근에 의해 더욱 격화되었다. 그런 측근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로 블라디미르 체르트코프를 들 수 있는데, 그는 톨스토이의 신임을 얻고 작가의 후기 작품과 가르침을 널리 퍼뜨리기 위해 조직 활동에 끊임없이 간여한 논란의 여지가 많은 사람이었다.

톨스토이가 정교회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정교회 신앙의 기본 교리 일부를 거부하고 나선 것도 갈등을 키웠다. 이에 대해 정교회는 1901년 톨스토이를 파문했다.

10월 28일 이른 시간에 톨스토이는 불면의 밤을 보내고 일어나 막내딸 알렉산드라에게 작별을 고한 뒤 자신의 주치의 두샨 마코비츠키와 함께 야스나야 폴라냐 영지를 떠났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셰키노 역으로 가는 험로를 통과했다. 이곳에서 그들은 코젤스크 역(칼루가 주)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사샤(알렉산드라)와 체르트코프에게 전보를 치고 나서 그들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삶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인근의 유명한 종교 성지 옵티나 푸스틴(Оптина Пустынь) 은거 수도원으로 향했다.

10월 29일 톨스토이와 마코비츠키는 옵티나 푸스틴에서 북쪽으로 불과 얼마 되지 않은 곳에 있는 샤마르디노 수녀원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그들은 1891년 수녀원에 들어간 톨스토이의 누이동생 마리야(1830-1912)를 방문했다. 이튿날에는 막내딸 사샤가 이곳에 도착했다. 그날 저녁 톨스토이는 아내에게 자신을 따라오지 말라고 청하는 편지를 썼다.

10월 31일 이른 아침 톨스토이는 사샤, 마코비츠키와 함께 샤마르디노를 떠나 다시 코젤스크 역으로 우회했다. 이곳에서 그들은 로스토프 나도누 행 삼등칸 객차에 올랐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82세 나이로 이미 쇠약해진 건강에다 쉴 새 없이 여행하며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담배연기 자욱하고 사람들로 붐비는 낡아빠진 객차 안에서 시달리다 그만 폐렴에 걸리고 말았다.

저녁 무렵 마코비츠키와 사샤는 톨스토이의 병세가 역력하고 체온도 상승하자 깜짝 놀라 열차에서 가장 가까운 아스타포보 역으로 톨스토이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유능한 역장이었던 이반 오졸린은 톨스토이를 알아보고 즉시 자기 집 큰 방을 작가에게 내주며 긴급상황에 대처했다.

그 다음 주 내내 아스타보프 역은 세계적 화제의 중심지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보 속보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갔고, 기자들이 역으로 몰려들었으며, 마지막 무렵에는 심지어 프랑스 뉴스영화사 파테(Pathé)의 촬영 팀까지 찾아왔을 정도였다.

11월 2일에는 체르트코프가 (톨스토이의 요청으로) 모습을 보였고, 그날 저녁 톨스토이의 아들 세르게이도 도착했다. 그날 하루가 끝날 무렵 톨스토이의 부인 소피야 안드레예브나가 다른 자녀들과 함께 일등칸 객차를 타고 도착했는데, 이 객차는 역에 그대로 남아 한동안 그들의 거처로 쓰였다. 그녀는 톨스토이의 측근들에 가로막혀 역장의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톨스토이의 부인은 그가 혼수상태에 빠지고 나서야 비로소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톨스토이는 11월 7일 오전 6시 5분에 종부성사를 받지 않고 숨을 거뒀다.

오졸린은 침실을 대문호의 임종 당시 모습 그대로 두기로 했다. 침대 옆 램프 불빛으로 드리워진 톨스토이의 베게 머리와 상반신의 그림자 윤곽도 벽지에 그려져 보존됐다. 침실로 들어가는 문 가운데 하나에는 기념판이 하루 만에 설치됐다. 역사에 걸린 시계의 시간도 6시 5분에 멈췄다.

11월 8일 장례행렬이 아스타포보 역을 떠나 야스나야 폴라냐로 향했다. 다음날 톨스토이는 야스나야 폴라냐 영지에서 십자가 하나 없이 조촐하게 마련된 묘지에 안장됐다. 안장식에는 정부 요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백 명의 사람이 참석했다.

톨스토이의 삶은 농노제 농경사회에서 불균형 발전과 산업화의 격동기까지 판이하게 다른 두 시대를 아울렀다. 톨스토이의 마지막 나날은 그가 깊이 꿰뚫어본 급속한 사회적 변화의 상징이자 수단이었던 철도를 따라 펼쳐졌어야 마땅할 것이다.

1918년 아스타포보 역은 '레프 톨스토이' 역으로 개명됐다. 하지만 '아스타포보'라는 이름은 박물관 이름으로 남았고, 톨스토이의 작품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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