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데라주의자들, 그들은 누구인가?

1940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기구(OUN)'의 일파인 OUN-B를 이끈 스테판 반데라(С. Бандера,1909-1959)의 초상화와 '우파'의 심볼이 새겨진 깃발을 치켜들고 시위 중인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 (사진제공=로이터)

1940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기구(OUN)'의 일파인 OUN-B를 이끈 스테판 반데라(С. Бандера,1909-1959)의 초상화와 '우파'의 심볼이 새겨진 깃발을 치켜들고 시위 중인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 (사진제공=로이터)

러시아 정부와 언론의 관점에서 볼 때, 러시아 - 서방/우크라이나 간 정보전쟁에서 가장 핵심적 문제 중 하나는 우크라이나의 새로운 정치생활에서 '우크라이나 네오나치', '파시스트', 그리고 이른바 '반데라주의자들(бандеровцы)'라고 불리는 이들이 사실상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격적으로 크림 반도를 합병한 러시아가 당시 이유로 내세운 것이 다름 아닌 "파시스트 청년들로부터 러시아계 주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이었다. 쿠데다를 주도한 우크라이나 과도정부와 이들을 지지해온 서방은 이를 크렘린 선동가들이 지어낸 거짓말로 치부하면서 자신에 대한 비난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고 있다.

실제로 마이단을 움직인 이데올로기는 무엇인가? 그 이데올로기에 민족주의가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되는가? 쿠데타에 참가한 모든 '애국', '친서방' 세력들을 1930~40년대 우크라이나 반란을 주도한 '반데라 추종자들'의 후계자로 보는 것은 타당한가? 민족주의, '반데라주의'가 포스트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역사와 정치생활에 미친 영향은 어떤 것인가?

독립 우크라이나의 정치생활에서 지역간 대립의 문제

우크라이나 정치는 이미 수년 동안 국토의 서부와 그와 심정적으로 가까운 중부 그리고 남동부 지역 간에 대립 양상을 빚어 왔다. 이 두 부분은 유권자수에서 거의 비슷한 규모이기 때문에 어느 쪽이 더 적극적으로 주장을 펼치느냐에 모든 것이 좌우되어왔다. 이 두 지역은 문화적으로도 서로 많이 다르다. 동부 지역은 러시아어 사용 인구가 압도적이며 서부 지역은 상대적으로 우크라이나어 사용 인구가 더 많다. 두 지역은 경제적으로도 격차를 보인다. 대부분의 산업시설이 동부에 위치해 있으며, 서부는 농업 지대라고 할 수 있다.

리보프(서우크라이나)에 있는 스테판 반데라 동상. (사진출처=공개자료)
리보프(서우크라이나)에 있는 스테판 반데라 동상. (사진출처=공개자료)

하나의 국가로서 우크라이나는 우크라이나인들이 스스로 자결권을 행사해서 생겨난 결과가 아니라, 상이한 지역 출신의 볼셰비키들에 의해 형성된 것이며 소련 붕괴 이후 우크라이나 정치인들의 최대 과제는 어떻게든 나라를 단합시키고 구성원 전체를 위한 공통의 정치적 공통분모를 찾는 것이었다. 1990년대 말에는 이에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레오니드 쿠치마 전 대통령은 내분을 해소하고 국가의 중앙집권화에 큰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이후 정치적 투쟁이 격화되면서 그 과정에서 지역간 반목이 다시 수면으로 떠올랐다.

오렌지 혁명은 동부 지역에 대한 서부 지역의 일종의 승리였으며, 이는 국가 분열을 고착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의 모든 사건들이 반목을 더욱 심화시켰다. 현재의 유로마이단 시위대는 그 대부분이 서부 지역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동부 지역 주민들과의 사회적 합의 따위는 고려하지 않고 있다.

2차 대전 와중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최종 형성된 것은 20세기 초반으로 독일 나치주의, 그리고 당시의 다른 극우 사상들과 매우 유사한 특성을 갖는다. 극단적인 불관용, 직접적 정치행동, 폭력적 성향, 소수자들의 권리 부정이 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특징이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사회 내부의 비우크라이나 분자들을 최대한 무자비하게 탄압하면서 민족을 '철권'으로 일으켜 세워야 한다고 여긴다. 문제는 그들이 말하는 '비우크라이나 분자들'이 우크라이나에서 '다수'를 점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우크라이나 서부에서 가장 우크라이나어 사용인구가 집중된 갈리치나에서도 이러한 '불순분자들'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며 동남부 지역에서는 절대적인 다수를 점하고 있다. 만약 우크라이나 서부 출신들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권좌에 오른다면 그것은 반대파와 협상을 할 필요성을 인정하는 어느 정도 온건적인 세력일 것이다. 하지만 쿠데타로 권좌에 오른 것은 과격파이며 이런 상황에서 우크라이나의 내분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고 있다.

로만 슈헤비치 (사진출처=공개자료)
로만 슈헤비치 (사진출처=공개자료)

2차 대전 당시 주로 서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스테판 반데라와 그의 오른팔 로만 슈헤비치가 이끄는 우크라이나 반란군이 활동했다(두 명 모두 빅토르 유셴코 우크라이나 전 대통령에 의해 사후 우크라이나 영웅의 칭호를 얻었으나, 2010년 빅토르 야누코비치 차기 대통령에 의해 박탈당했다). 이들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역사에서 가장 잘 알려진 대목이다.

반데라주의자들과 독일 점령군과의 관계는 복잡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무엇보다 자신의 주적이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사실에 입각해 행동했다. 이러한 접근방법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자체의 성격에 근원하는 것으로 그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인의 주적은 '모스칼리(москали)', 즉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 러시아인 전체를 지칭한다. 여기에 폴란드인과 유대인도 포함되었다.

서우크라이나 땅이 폴란드에 속해있던 1939년 이전까지 스테판 반데라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기구(OUN-B)는 반폴란드 정치 및 파괴 공작을 담당했으며 이후 소련 정부로 그 타겟을 변경했다. 나치독일의 제3제국은 반데라주의자들의 활동이 자신들에게 유익할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예를 들어, 독일은 "우크라이나 땅을 불순분자, 즉 무엇보다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정화"시키겠다는 우크라이나인들의 욕망을 이용했다.

하지만 독립국 우크라이나를 꿈꾸는 반데라의 생각을 나치독일은 지지하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반데라는 독일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어 1944년까지 수감됐다. 물론 다른 수감자들과 비교하면 상당히 안락한 여건으로 그는 수용소 생활을 보냈다. 독일 점령 기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SS '갈리치나' 사단, '나흐티갈' 대대, '우크라이나 용병', 현지 경찰과 같은 나치독일군 조직에 소속되어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독일군에 소속되지 않은 부대들도 자신들이 역사적으로 우크라이나 땅이라고 생각하는 지역에서 인종청소를 실시했으며 그 과정에서 주기적으로 독일 점령부대와 군사적 충돌을 빚기도 했다. 널리 알려진 사건으로는 1941년 우크라이나 서부에서의 유대인 학살 사건, 그리고 폴란드 역사학자들의 자료에 따르면 폴란드계 국민 약 15만 명이 살해된 1943-44년의 이른바 '볼린 학살극(Волынская резня)' 같은 비극이 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이론과 행동에 동의하지 않는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들도 테러의 대상이 되었다.

1944년 독일군은 진격해오는 소련 붉은 군대와의 전투를 위해 우크라이나반란군(УПА)을 지휘하도록 반데라를 강제수용소에서 석방했다. 반데라주의자들이 가장 활발한 활동을 보인 것인 1944-45년, 그리고 냉전이 시작되면서 영국과 미국 정보기관들이 그들과 협력을 개시한 전후 초기였다. 하지만 1950년대 중순이 되자 파괴활동은 사그라들었고, 많은 이들이 평화로운 삶으로의 복귀를 원했다. 반데라 자신도 전후 뮌헨에서 영국 정보부를 위해 일하면서 그 보호 하에 살다가 1959년 KGB 요원 보그단 스타신스키가 쏜 청산가리 주사액이 담긴 특수총탄을 맞고 죽음을 맞이했다.

스테판 반데라의 신분을 증명하는 서류(“독일 강제수용소 우크라이나인 정치범 연맹” 회원증). 이 서류에는 ‘스테판 포펠(Stepan Popel)’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키예프 소재 우크라이나 국립 역사박물관 ‘스테판 반데라: 증명서들’ 전시회에서 공개됐다.
스테판 반데라의 신분을 증명하는 서류("독일 강제수용소 우크라이나인 정치범 연맹" 회원증). 이 서류에는 '스테판 포펠(Stepan Popel)'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키예프 소재 우크라이나 국립 역사박물관 '스테판 반데라: 증명서들' 전시회에서 공개됐다.

구소련 시절 과격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는 금지된 사상이었다. 그 덕분에 2차 대전 후 극우 민족주의는 전혀 세를 불리지 못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들어 1930-40년대와 유사한 극우민족주의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과거의 핵심 주동자들이 민족주의적 성향의 우크라이나인들 사이에서 영웅으로 추대되었고 그들에 대한 서적과 그들이 과거 내걸었던 슬로건들이 행동지침이 되었다. 구소련이 해체되고 거의 사반세기 동안 이러한 극우민족주의를 보고 느끼면서 우크라이나의 한 세대가 성장했다.

유로마이단의 반데라주의자들

오늘날의 유로마이단과 과거 반데라주의자들을 이어주는 것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라는 공통된 이데올로기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는 하나의 완전한 이데올로기다. 종종 그 안에서도 온건파와 과격파를 나누려는 시도가 있어 왔다. 여타의 유럽 국가에서도 이런 구분을 하곤 한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경우 이는 옳지 않다. 모든 유럽 민족주의는 애당초 '온건한' 사상으로 형성되었으며, 그 과격한 양상은 차후에야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헌데, 우크라이나에서는 처음부터 극우 이데올로기로 출발하여, 전통적인 민족 정체성이나 종교적 자의식마저 거부하도록 하는 과격성을 드러냈다. 유로마이단의 자유진영(온건파)은 자신만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사상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그것이 그들이 약점이었다. 극우민족주의 단체 '프라비 섹토르(Правый сектор, 우파진영)'와 '스보보다(Свобода, 자유)'에 대항할 만한 사상적 근거가 그들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

대중매체와 교육제도에 스며든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포스트소비에트 시대가 막을 올린 이래 우크라이나 동남부 지역은 서부와는 달리 딱히 자신만의 정체성과 민족이데올로기라고 할 만한 것을 마련하지 못했다. 그것은 상당히 안타까운 결과로 나타났다. 키예프의 권력을 남동부 출신들이 잡고 있을 때조차 우크라이나 정치의 인문 영역 전체가 갈리치나의 민족주의자들의 손아귀에 남아 있도록 수수방관한 것이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 정부의 교육 및 언론정책은 마치 어떠한 의견의 대립이나 분열도 없는 것처럼 모든 것이 일사분란하게 단일한 민족주의 트렌드를 따랐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사실상 국가의 교육제도 전반에 독점적인 권력을 휘둘렸고 매스미디어 정책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의 신세대는 극우민족주의 사관이 담긴 교과서로 우크라이나 역사를 배우며 자라났다. TV에서는 연일 우크라이나 과격 민족주의 사상을 홍보하는 프로그램들이 방영됐다.

학교 교육과 매스미디어를 통한 이러한 훈육의 결과를 우리는 현재의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지켜보고 있다. 우크라이나인으로서의 정체성에 크게 목매지 않거나 자신을 아예 러시아인이라고 생각하는 부모 세대를 둔 20대 청년들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소리 높여 외치는 현상을 이제 동남부 지역에서도 관측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올레크 네멘스키 - 역사학박사,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슬라브학연구소 연구원, 모스크바국립대학교 우크라이나·벨라루스학센터 근무, 러시아전략연구소(РИСИ)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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