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성탄절 – 기독교와 이교의 결합

성탄절 축하 분위기는 성탄절 당일부터 12일간 이어졌는데 이 기간을 ‘스뱌트키(святки)’라고 불렀다. 성탄절 다음에 오는 기독교의 큰 명절인 예수 세례절까지 계속됐다.

성탄절 축하 분위기는 성탄절 당일부터 12일간 이어졌는데 이 기간을 ‘스뱌트키(святки)’라고 불렀다. 성탄절 다음에 오는 기독교의 큰 명절인 예수 세례절까지 계속됐다.

타스
루시(옛 러시아)에서는 성탄절과 새해를 맞는 시기에는 특별히 신비한 힘이 있다고 여겨졌다. 이 시기와 관련된 관습과 전통들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고대 슬라브 신앙에도 뿌리를 두고 있다.

러시아 교회는 구력인 율리우스력으로 성탄절을 지낸다. 율리우스력의 날짜는 신력인 그레고리력보다 대략 2주 정도 늦다. 그래서 성탄절도 유럽처럼 12월 25일이 아니라 1월 7일이다.

다음 해를 보다 더 ‘정확하게 내다보기’ 위해서 교회가 엄격하게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은 운세를 보러 갔다. 일 년 중 가장 밤이 긴 날에는 이날에 아주 적합한 일이 벌어졌다. 슬라브 민간 신앙에서는 특별히 이날 힘이 왕성해진 잡신들이 사람들과 만나기 위해 요리조리 돌아다닌다고 믿었다.

보통 가장 많이 점을 치는 도구가 밀초였다. 물이 담긴 그릇에 녹인 밀랍을 붓거나 그냥 촛불을 기울여 촛농이 떨어지도록 했다. 물에 여러 가지 교묘한 형상이 만들어지면 그 모양을 보고 미래를 예언했다. 예컨대, 커다랗게 한 덩어리로 형상이 만들어지지 않고 작은 동그란 방울이 많이 만들어지면 좋은 징조라고 여겼다. 즉, 내년에 금전운이 따른다는 의미였다. 사과를 닮은 형상이 만들어지면 건강하고 지혜로운 생활을 할 것으로 여겼다.

러시아인의 조상들이 가장 독창성을 발휘했던 분야는 운명이 맺어준 신랑을 알아 맞히는 점이었다. 이는 놀랄 일이 아니었다. 성탄절이라는 축일은 모든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40일의 금식 기간이 끝나는 것을 의미했다. 금식 기간에는 결혼식도 금지되었기 때문에 성탄절이 지나면 교회에서는 바로 ‘결혼 시즌’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미래의 신랑이 누군지 진실을 밝혀내지 않으면 오히려 점이 제 역할을 못하는 것과 다름 없었다.

단화로 보는 결혼 점의 인기가 가장 높았다. 길 밖으로 던진 단화의 앞 코가 어디를 향하는지를 보고 '어느 방향으로 시집을 가게 될지'를 예언했다.

그런데 아가씨가 용기를 내야 할 정도로 무서운 점술도 있었다. 예를 들면 거울 점이다. 이 점을 치려면 아가씨는 밤에 어둠 속에서 거울 두 개를 사이에 두고 앉아야 했다. 그런 다음 촛불을 켜고 거울에 비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운명의 짝, 숙명의 짝, 나타나라'를 세 번 반복해 말한다.  아가씨가 신랑의 얼굴을 보게 되는 즉시 '저리 가!'를 외쳐야 했다. 그러면 미래 신랑의 얼굴을 하고 나타났던 귀신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교적 관습 외에도 성탄절은 기독교 전통으로도 가득 찬 축일이었다. 그래서, 성탄 전야인 이브에는 금식을 가장 엄격하게 지켰다. 하늘에 첫 별이 뜨기 전에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소외된 이들에게 적선하는 일도 성탄절 전야의 목록에 포함되었는데 황제도 동참했다. 16세기에서 17세기까지 성탄 전야가 되면 황제는 감옥과 구빈원을 둘러보면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직접 선물을 하사했다.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이 황제가 지나면서 돈을 나눠준다는 소문을 듣고 모스크바 전역에서 이곳으로 일찌감치 모여들었다.

성탄절 축하 분위기는 성탄절 당일부터 12일간 이어졌는데 이 기간을 ‘스뱌트키(святки)’라고 불렀다. 성탄절 다음에 오는 기독교의 큰 명절인 예수 세례절까지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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