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에 울려 퍼진 아리랑

(사진제공=블라디미르 루포브스코이/RusArt)

(사진제공=블라디미르 루포브스코이/RusArt)

이날 열린 특별 음악회는 한국의 월드마스터스위원회가 모스크바 관객들에게 한국 전통 음악을 소개하는 자리로 프로그램 명칭은 ‘한국의 리듬’이었다.

모스크바의 평범한 목요일. 차가운 가을 공기 속에서 네온 불빛이 교통체증에 가로막힌 자동차들의 신경질적인 경적소리에 불안하게 흔들렸다. 코스모다미안스카야 강변로에 도시의 부산한 일상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곳 모스크바 강 볼쇼이 크라스노홀름스키 다리 아래 쪽에는 모스크바 국제 뮤직하우스(Московский международный дом музыки)가 자리 잡고 있다. 뮤직하우스의 둥근 지붕 위에 서 있는 높이 9.5미터의 높은음자리표는 모스크비치들에게 문화생활과 고전음악의 상징이 된 지 오래다. 높은음자리표는 무게 6톤에 달하지만, 매우 정교한 회전 메커니즘이 내부에 설치돼 있어 기류를 만나면 회전하며 거대한 풍향계로 변한다.

추위에 몸이 굳은 성장한 관객들이 씨어터홀 입구 계단 위로 종종걸음을 쳤다. 이날 열린 특별 음악회는 한국의 월드마스터스위원회(World Masters Committee)가 모스크바 관객들에게 한국 전통 음악을 소개하는 자리로 프로그램 명칭은 '한국의 리듬'이었다.

조명이 꺼지자 무대 위로 네 명의 연주자가 나타났다. 사회자는 사물놀이가 '네 개의 타악기 연주 음악'을 뜻한다고 말했다. 관객들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공연이 시작됐다. 무대 위 상황은 관객 대다수에게 낯설었다. 부드러운 가죽 미투리에 흰색 바지저고리를 걸친 연주자들이 차례로 처음 보는 악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여기에는 음악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고 듣기 거북한 불협화음과 혼란스러운 울림만 있었다. 이 모든 상황에 모종의 박자를 부여하려는 것처럼 보였던 크고 둥근 북 소리는 작은 꽹과리 소리에 묻혀 버렸다. 높게 말아 올린 백발 머리에 커다란 호박 귀걸이를 차고 내 오른쪽 옆자리에 앉아 있던 노부인은 무대로부터 몸을 돌리더니 가느다란 손가락에 굵직한 호박반지를 끼고 있던 두 손으로 귀를 막으려고 했다. 한편 무대 위에서는 공연이 계속되고 있었다. 연주자들의 흰색 저고리 가슴팍에 십자형으로 둘러져 있는 주황색과 황록색 띠는 이들의 등 쪽에서는 우스꽝스러운 매듭으로 한데 묶여 있었다. 이 띠는 연주자들의 동작에 따라 흔들리며 마치 이들과 함께 춤을 추는 듯했다.

연주 속도가 더 빨라지자 네 개의 악기 소리가 하나의 격렬한 소리로 합쳐졌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러시아 사람들의 귀에 익숙한 소리의 음악은 아니었다. 하지만 소리의 진폭과 급격한 반전, 귀에 거슬리는 리듬에서는 힘과 에너지, 원초적인 열정이 느껴졌다. 옆자리의 노부인은 더 이상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녀는 심지어 몸을 앞으로 더 내밀기조차 했다. 장담컨대 그녀는 리듬이 조금만 더 또렷했다면 긴 손가락으로 의자의 광택 손잡이를 두드리며 장단을 맞추기 시작했을 것이다.

사물놀이 소리가 뚝 그치고 갑자기 정적이 찾아와서인지 객석이 더 어두워진 듯했다.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러시아 관객들이 정신을 가다듬는 동안 태평성대를 기리는 태평무 무용수가 무대에 등장했다. 그녀는 매우 알록달록한 당의의 긴 치마자락 아래로 발을 빠르게 내딛다가 이따금씩 갑자기 한쪽 다리를 살짝 들어올려 반쯤 접어 앞으로 내민 다음 가만히 서 있다가 아주 부드럽게 조금씩 느리게 움직였다. 그녀의 춤 동작에 담긴 의미는 러시아 관객들에게 사물놀이보다 훨씬 더 난해했지만, 여기에는 최면을 거는 듯한 매력적인 뭔가가 있었다.

다음 공연 차례는 장구였다. 나이든 여자와 젊은 여자 두 사람이 모래시계 모양의 커다란 장구(사물놀이 공연 때 이미 등장한 악기)를 무대 위로 가지고 나와 자신들 앞에 놓고 마루에 앉은 다음 화사한 선홍색 치마 주름을 오랫동안 정성 들여 펼쳤다. 공연 내내 '어이'하고 가슴 저미는 듯한 쉰 외침소리가 이어졌는데, 처음에 이 소리는 내 옆에 앉은 예민한 노부인을 놀라게 했다. 잠시 뒤 그녀는 내 쪽으로 몸을 숙여 "이건 박자가 바뀔 때마다 나이든 여자가 젊은 여자에게 말하는 소리다"고 말했다. 나는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고 두 사람의 어깨와 목 선이 물 흐르듯 부드럽게 움직이는 모습과 이들이 장구를 살며시 잡고 있는 모습, 그리고 이런 모습이 두 사람의 유순한 장구가 뿜어내는 광포하고 맹렬한 소리와 충돌하는 광경을 계속해서 황홀하게 지켜보았다.

그 다음에는 불면 날아갈 듯한 모습의 어린 아가씨가 무대 위로 나왔다. 나와 내 옆의 노부인은 당혹해 하며 서로 쳐다보았다. 가냘픈 아가씨가 어떻게 자신만큼이나 커다란 악기를 무대 뒤에서 끌고 나올 수 있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사회자가 이 악기는 가야금이라고 소개했다. 아가씨는 가야금을 특수한 받침대 위에 가볍게 올려 놓았다. 그리고 마법 같은 연주가 시작됐다. 가야금의 12현 위로 달리는 그녀의 황홀한 손놀림에 숨을 죽이며 눈을 지그시 감지 않을 수 없었다. 눈을 뜨고 보니 가야금 요정은 자신의 매혹적인 악기 위로 몸을 푹 숙인 채 더 크고 구슬피 노래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열심히 가야금을 타고 있었다. 시각이 혼란스러워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비가와 경쾌함, 비상과 우아함이 어우러진 공연이었다.

공연이 막바지에 이르자 모든 연주자가 각자 특이한 악기를 들고 무대로 나왔다. 그중에는 멋진 상모를 쓴 아저씨도 있었는데, 상모 꼭대기에는 긴 띠가 달려 있었다. 상모 잽이 아저씨의 머리가 마치 경첩에 걸려 있는 듯이 돌아가자 상모 띠가 멋들어진 동그라미와 8자 모양을 만들어 냈고, 빙빙 도는 상모 띠 사이를 깡총깡총 뛰어 넘는 아저씨의 모습에 객석은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즐거워했다.

(사진제공=블라디미르 루포브스코이/RusArt)
(사진제공=블라디미르 루포브스코이/RusArt)

이후 한국 명인들이 한 자리에 모두 모여 '아리랑' 노래를 불렀다. 놀랍게도 내 옆자리 노부인도 갑자기 아리랑을 따라 부르기 시작하더니 익숙한 동작으로 의자 팔걸이를 탁탁 치며 리듬을 타고 있었다. 곧이어 명인들이 무대에서 객석으로 나오더니 관객들을 무대 위로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수줍어하며 사양했고 어떤 이는 벌써 멀리에서 앞으로 뛰어 나오고 있었다. 희망자에게는 모두 소고와 소고채, 부채를 나눠 주었다. 한국인과 러시아인이 함께 어울린 원무가 모스크바 국제 뮤직하우스 씨어터홀의 아늑한 무대 위를 빙빙 돌았다. 사람들은 손에 손을 잡고 노래 부르며 서로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바로 이런 모습이 한-러 로켓 합작 발사와 양국 정상회담보다 한-러 친선에 더 가치 있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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