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인 이름에 얽힌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

(사진제공=russian7.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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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러시아에서는 어떻게 이름을 지었을까? 러시아인들은 왜 아이들에게 ‘코소이(Косой, 사팔뜨기)’나 ‘즐로브니(Злобный, 심술쟁이)’같은 이름을 붙였을까? 러시아 차리들의 ‘아명(домашнее имя)’과 ‘진명(публичное имя)’은 무엇이었을까? 왜 어떤 이름들은 금지되었을까? 자세히 들여다 보면 러시아인의 이름은 역사, 문화, 관습이 얽히설켜 있는 복잡한 공식과도 같다.

별명(прозвища)

러시아에서 이름을 짓는 전통은 기독교 도입 훨씬 전부터 나왔다. 관습과 습관, 외모, 주변 환경과 관련된 말이면 무엇이든 이름이 될 수 있었다. 출생 순서에 따라 지은 '페르보이(Первой, 첫찌)', '프토라크(Вторак, 둘찌)', '트레티야크(Третьяк, 셋찌)' 등 숫자와 관련된 이름들이 있었는가 하면, '체르냐바(Чернява, 검둥이)', '벨랴크(Беляк, 흰둥이)', '말류타(Малюта, 땅딸보)' 등 외모 특징과 관련된 이름들도 있었고, '몰찬(Молчан, 말수 적은 사람)', '스메야나(Смеяна, 잘 웃는 사람)', '이스토마(Истома, 무기력한 사람)' 등 성격 특징들과 관련된 이름들도 있었다. 자연의 동식물과 관련된 '비크(Бык, 황소)', '슈카(Щука, 꼬치고기)', '두프(Дуб, 전나무)' 등의 이름도 있었다. '로시카(Ложка, 숟가락)', '쿠즈네츠(Кузнец, 대장장이)', '슈바(Шуба, 털외투)' 등 수공업 관련 이름들도 있었다. 이름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 적절한 다른 이름으로 바뀔 수 있었다.

악령 또는 타인에게서 부정(不淨) 타는 것을 막기 위해 '네크라스(Некрас, 못난이)', '즐로바(Злоба, 악의), '크리프(Крив, 외사팔뜨기)' 등 일부러 없는 결점을 만들어내 이름을 지어주는 일도 잦았다. 이처럼 이름을 천하고 나쁘게 지어주면 아이가 부정을 타지 않고 무병장수한다는 믿음에서 그리 했다. 이미 '코소이(사팔뜨기)'인 아이가 사팔뜨기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루시의 세례(고대 러시아의 기독교 수용)'와 함께 기독교식 이름이 도입됐지만, 이러한 별명들은 사라지지 않고 보조적인 이름으로 살아 남았다. 별명은 하층민들 사이에서 뿐 아니라 알렉산드르 넵스키 대공(Александр Невский, 네바강의 알렉산드르), 계몽시인 시메온 폴로츠키(Симеон Полоцкий, 폴로베츠 사람 시메온), 모스크바 공후 이반 칼리타(Иван Калита, 돈주머니 이반)처럼 귀족층에서도 사용됐다. 이같은 별명은 널리 사용되다가 표트르 대제(1세)에 의해 금지되었다. 그러나 이미 15세기부터 이러한 별명은 가문의 성(姓)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명동인(二名同人)

14~16세기 러시아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그날이 추모일인 성자를 기려 그의 이름을 아이에게 붙였다. 공식적인 이름인 '진명'과는 달리 이러한 '정교명(прямое имя)'은 가까운 친지들 사이에서만 사용됐다. 예를 들면, 차리 바실리 3세의 정교명은 가브릴(Гавриил)이었고, 그의 아들 이반 뇌제(Иван Грозный)의 정교명은 티트(Тит)였다. 친형제들의 진명과 정교명이 모두 같은 희한한 상황도 벌어질 수 있었다. 이반 뇌제의 큰아들과 작은 아들은 공식석상에서는 둘다 드미트리, 친지 사이에서는 우아르(Уар, 초기 기독교 성자)로 불렸다.

정교명을 짓는 전통은 류리코비치(Рюрикович) 가문에서 시작됐다. 로마노프 왕조 이전까지 고대 러시아를 통치했던 류리코비치 왕조의 대공들은 '현명한 야로슬라프-게오르기(Ярослав-Георгий Мудрый)' 또는 '블라디미르-바실리 모노마흐(Владимир-Василий Мономах)'처럼 이교에서 유래한 이름과 기독교식 이름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류리코비치 왕조에서 이름은 두 개의 어원을 가진 슬라브식과 스칸디나비아식 두 범주로 나뉘었다. 야로폴크(Ярополк, '불(яр)'+'부대(полк)'), 스뱌토슬라프(Святослав), 오스트로미르(Остромир)같은 이름이 전자이고, 올가(Ольга), 글레프(Глеб), 이고리(Игорь) 같은 이름은 후자였다. 본디 이름은 오직 대공 가문 사람들만 가질 수 있는 것이었는데 14세기에 들어와서 일반에 통용되기 시작했다. 가문을 나타내는 '혈통명(родовое имя)'은 정해진 틀을 따라야 했다. 예를 들어 조부가 운명하려는 순간에 갓난 손자가 있다면 할아버지의 이름을 손자에게 붙였다. 하지만 살아있는 형제에게 같은 이름을 붙이는 일은 허용되지 않았다.

중세 러시아에서 기독교가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 슬라브식 이름은 과거로 사라졌다. 심지어 금지 이름 목록도 존재했는데, 가령 야릴로(Ярило)나 라다(Лада)처럼 이교와 관련된 이름들에는 특별 금지령이 내려졌다. 류리코비치 가문에서도 왕조에서 내려온 이름들 대신에 기독교식 이름을 붙이게 됐다. 러시아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장본인인 블라디미르 대공은 세례 당시(988년) 바실리, 그의 조모인 올가 대공비에게는 옐레나라는 세례명이 주어졌다.

로마노프가(家)의 이름들

예카테리나 여제(2세) 통치기에 로마노프 왕가의 이름에 일대 전환이 있었다. 그녀는 세 명의 손자에게 성 니콜라우스, 콘스탄티누스 대제, 알렉산드르 넵스키 대공을 기려 각각 니콜라이, 콘스탄틴, 알렉산드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세월이 흘러 로마노프 가계가 확대되자 거의 잊혀진 왕조 이름인 니키타, 올가, 심지어 교회달력에도 오르지 않은 로스티슬라프(Ростислав)라는 이름까지 등장했다.

조상을 기려 이름을 지어 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로마노프가 사람들은 이름을 지을 때 가장 먼저 선조의 관습을 따랐다. 니콜라이와 알렉산드르, 표트르라는 이름이 많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표트르 3세(1728-1762)과 그의 아들 파벨 1세이 암살된 이후 표트르와 파벨이라는 이름은 사용이 금지됐다.

혈통 미상의 이반

이반이라는 이름이 보통명사화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제정 러시아에서는 농민 세 명 중 하나가 이반이었다. 게다가 신분증 없는 부랑자들이 경찰의 손에 걸려서 '혈통이 뭐냐?'는 질문을 받으면 '기억이 안 난다', '그럼 이름은 뭐냐?' 하면 '이반이다'라고 하는 경우가 다반사여서 '혈통 미상의 이반(Иван, не помнящий родства)'이라는 표현이 생겨나기도 했다. 유대교 기원을 가진 이반이란 이름은 오랫동안 통치 왕조 가문에서는 흔히 사용되지 않았으나, 이반 1세 때부터는 류리코비치 가문의 군주 네 사람이 이반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이 이름은 로마노프가 사람들도 사용했지만, 1764년 이반 4세(뇌제)의 죽음 이후로 사용이 금지됐다.

'블라디미르의 아들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중세 러시아에서 혈통명의 한 종류로 부칭(父稱)을 사용한 것은 자신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증명해주는 표식이었다. 귀족이든 평민이든 자신을 가리켜 '표트르의 아들 미하일' 식으로 소개했다. 또 부칭에 '-의 아들'을 가리키는 어미 '-이치(-ич)'를 덧붙이는 것은 귀족 가문의 사람들에게만 허용되는 특권으로 여겨졌다. 예를 들자면, 류리코비치 가문 사람들이 스뱌토폴크 이쟈슬라비치 같은 식으로 이름을 지을 수 있었다.

19세기부터는 신흥 인텔리겐치아도 부칭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농노제 폐지(1861년) 이후에는 농민들도 부칭 사용이 허용됐다. 이제 현대 러시아인의 삶은 부칭을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 부칭은 존칭이기도 하지만, 이름과 성이 똑같은 사람들을 구분하는 데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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