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레르몬토프, '짧고 굵은' 생을 살다간 시인

(일러스트=나탈리야 미하일렌코)

(일러스트=나탈리야 미하일렌코)

위대한 러시아의 시인 미하일 레르몬토프(1814~1841), 저작만큼이나 강렬했던 그의 인생

그는 단숨에 유명인이 됐다. 위대한 시인 푸시킨이 결투에서 목숨을 잃고 전 러시아가 슬픔에 잠겨있던 바로 그 때였다. 22세로 근위기병연대 소위였던 레르몬토프가 푸시킨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쓴 대담하고 다분히 감정적인 시 한 편이 필사되어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돼 읽혔고 페테르부르크에서 아주 유명해졌던 것이다. 이 시에서 레르몬토프는 푸시킨의 죽음에 사교계와 권력층이 책임이 있다며 대놓고 비난했다. 당국은 그의 시에 대한 즉각적인 대응으로 이 자유사상가 시인을 체포해 당시 오랜 전쟁이 계속되던 캅카스로 유형 보냈다.

레르몬토프는 캅카스를 사랑했고 조지아에서의 생활도 마음에 들어 했다. 게다가 당시 레르몬토프는 전투에 참가할 일이 없었고 '한두 차례 총소리를 들은 것'이 전부였다. 대신 그는 구상과 줄거리를 잔뜩 갖고 유형지에서 돌아왔고 그로부터 2~3년 사이 거의 모든 대표작을 완성했다.

꼭 읽어봐야 할 미하일 레르몬토프의 작품 5편

1. 「돛」 - 레르몬토프가 18살에 쓴 작품으로, 가장 많이 인용되고 대중적인 시이다. 시인의 불안한 마음을 피난처가 아닌 폭풍을 찾는 좌초한 배에 비유했다. "폭풍우 속에 평안함이 있듯이"


2. 「가면무도회」 -1835년에 쓰인 이 운문극은 질투와 도박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다가 결국 아내를 살해하는 한 귀족의 이야기이다. 레르몬토프는 이 작품이 무대에 오르기를 바랐지만, 너무 격정적이라는 이유로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다.


3. 「시인의 죽음」 - 이 작품은 레르몬토프가 1837년 푸쉬킨의 죽음을 경험하고 쓴 시이다. 이 시는 페테르부르크의 지식인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필사본으로 퍼졌다. 당국이 '자유사상'이라고 딱지 붙인 이 작품 때문에 레르몬토프는 캅카스에 유형 보내졌다.


4. 「악마」 - 레르몬토프는 불과 14살일 때 유럽 낭만주의 대작으로 일컬어지는 이 시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1839년 캅카스 유형에서 돌아온 때에도 완성하지 못했다. 이 시는 조지아의 풍경을 배경으로 때로는 악마적 형상으로도 변할 수 있는, 자연의 살아있는 힘으로서의 사랑을 찬미한다.


5. 「우리 시대의 영웅」 - 레르몬토프가 남긴 유일한 소설 우리 시대의 영웅의 주인공 페초린은 러시아 댄디즘의 반영웅으로, 잘생기고 냉소적인 숙명론자로 작가 자신의 모습이 어느 정도 배어있는 인물이다. 무심하고 반항적인 바이런풍 주인공 페초린과 비선형 플롯 구조는 여러 작가 세대에 큰 영향을 준 이 대작의 주요 특징이다.

그러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당국의 주목을 받게 됐다. 이번에는 당시 러시아에서 금지된 결투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시 캅카스로 유형가게 됐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지아가 아니라 체첸으로 보내졌고 이곳에서 실제 전투에 참전하게 된다.

레르몬토프는 전투 중에는 몸을 사리지 않았으며 지나친 용기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평상시 주위 사람들, 불행히도 레르몬토프에게 장난의 표적이 된 이들을 자주 곤란에 빠뜨리는 사람이었다.

레르몬토프와 그 주변에는 늘 사건이 일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 그가 죽은 후에도 오랫동안 그를 둘러싼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레르몬토프는 두 살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의 어머니는 극도로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이른 나이에 목숨을 잃은 원인이 바로 불행한 가정생활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레르몬토프의 아버지는 스코틀랜드계 러시아인이었다. 가문의 전설에 따르면, 중세시대의 시인 토마스 레르몬트(Thomas Learmonth, 토마스 라이머 Thomas the Rhymer로도 불린다)로 가문의 뿌리가 거슬러 올라간다. 레르몬토프의 아버지는 군인이었는데 재산은 없었지만, 여성과의 관계에서는 늘 성공을 거뒀다. 아내가 세상을 뜨자 그는 돈많은 장모에게 아들을 맡긴다. 아들에게 훌륭한 교육을 시켜줄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유일한 손자를 끔찍이도 아꼈다. 그러나 할머니의 사랑으로도 레르몬토프가 입은 가족사의 상처를 치유해줄 수 없었다.

레르몬토프는 감수성이 풍부했다. 이미 10살에 첫사랑을 경험했고 13살에 처음으로 진지한 시를 썼다. 그는 스스로 일찍 철들었다고 생각했고 그가 쓴 글이 증거였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길지 않은 삶 내내 그는 완전히 어린 아이같이 행동했다. 레르몬토프는 기병사관학교 재학 당시 유쾌한 학생무리의 중심이었고 늘 순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닌 꾀와 장난거리를 끊임없이 생각해내곤 했다.

그러나 학교를 마친 후에도 그의 유희는 계속됐다. 오히려 자신의 미래의 저작에 기반이 될 풍부한 경험과 자료를 축적할 수 있는 적기가 온 것이었고 그는 이에 매진했다. 젊은 시절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은 여인에게 레르몬토프가 복수한 일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는 그 여인 앞에서 다시 사랑에 빠진 척했고 상대의 마음을 얻은 다음......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그녀의 부모에게 자기 자신을 비방하는 내용의 편지를 익명으로 보냈다. 그는 이런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편지로 쓰면서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가장 놀라운 대목은 그가 여기서 복수를 멈추지 않고 한 번 더 꾀를 써서 이 여자가 결혼할 때 도우미(샤페르, 결혼식에서 관 들고 있는 사람) – 물론 신랑 측 도우미 – 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의 장난과 행동들은 다분히 악의적이었지만 그의 재능은 의심의 여지 없이 뛰어났다. 그는 재능이 아주 풍부했고 비단 문학에서만 두각을 나타낸 게 아니었다. 그는 섬세한 감성으로 음악을 느꼈고 그림도 굉장히 잘 그렸다. 그가 기병대에 지원한 것은 아마 당시 전통에 따랐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기병은 언제나 특별한 매력의 베일에 싸여 있었다. 그런데 레르몬토프는 늘 외모에 자신감이 부족했다. 다름 아닌 바로 이 외모 콤플렉스가 레르몬토프의 죽음을 초래한 한 원인일 수도 있다.

레르몬토프는 두 번째 캅카스 유배 중이었던 1841년 여름 퍄티고르스크에서 휴가를 보냈다. 그곳에서 그의 옛 친구인 니콜라이 마르티노프 소령과 운명의 결투가 벌어졌다. 당시에 많은 이들이 이 결투가 사실상 살인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난 150년간 실제로 결투의 원인이 무엇이었는가를 놓고 논쟁이 이어졌다. 가장 믿을만한 이야기는 아마도 외모는 매력적이었지만 두뇌회전이 그리 빠르다고는 볼 수 없었던 마르티노프를 레르몬토프가 늘 놀린 것이 화근이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의 원인이 두 사람이 흠모하던 한 여인이었거나(이런 설도 있다) 자유로운 방식으로 사고하는 레르몬토프를 제거하고 싶어 하던 차리 전제정치의 앞잡이가 꾸민 일(이 설은 소련 시기에 매우 인기 있었다)었거나 어쨌든 결투는 벌어졌다. 레르몬토프는 27세가 채 못되어 세상을 떠났고 러시아는 가장 전도유망한 시인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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