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이 나치 독일에 승리한 날인 승전기념일. 러시아에서 승전기념일은 언제나 특별한 날로 군사퍼레이드와 함께 성대하게 기념되어 왔다. 하지만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2차 대전을 겪은 세대는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참전용사와 그외 전쟁의 목격자들 중에 이제 생존자는 거의 없다. 문제는 사람과 함께 과거의 기억도 사라진다는 점이다. ‘기억되지 않은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을 우리는 되새겨야 한다.

러시아재외동포조정위원회 한국대표부의 예카테리나 포포바 회장은 “러시아 전역에서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도 그런 이유다. 사람들은 가족 기록을 뒤지며 자신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가 어떻게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는지 찾아나섰고 그에 대해 인터넷에 글을 쓰거나 가정내에서, 또는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전했다. 이런 움직임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상상이 되는가!”라고 말했다. 그녀는 “그리고 이런 움직임이 거리로 나오면서 ‘불멸의 연대’ 행진으로 모습을 갖췄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파시즘의 공포, 어떤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할 수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새로운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고 미래의 세대를 위해 평화를 수호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임을 알리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예카테리나 포포바. 사진제공: 미하일 이예카테리나 포포바. 사진제공: 미하일 이

금년 ‘불멸의 연대’ 행진은 중국, 호주, 베트남, 태국, 캄보디아 여러 도시에서 열리면서 아태지역으로도 넓게 확산됐다. 네팔, 인도, 뉴질랜드처럼 특정한 이유때문에 행진이 불가능한 곳에서도 사람들은 모였다. 그들은 벽보를 만들고 ‘기억의 벽’을 조성하는가 하면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포포바 회장은 “세계 곳곳에 러시아인들이 살고 있다. 그리고 서서히 그들은 파시즘에 대항해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 선열의 넋을 기리는 것이 그들의 몫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들이 역사적 기억을 보전하고 2차대전의 사건들이 왜곡되는 것을 막아야 된다는 생각으로 뭉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불멸의 연대’라는 개념은 전세계의 러시아인들을 위한 강력한 통합 기능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서울에서는 올해로 세 번째 ‘불멸의 연대’ 행진이 개최됐다. 부산은 올해가 첫 행사다. 한국에 사는 러시아인들은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고 조국과의 감정적, 문화적 연대감을 이어가고 싶어한다고 참가자들은 말했다.

참가자 중 한 명인 알렉산드르 알신은 “승전기념일은 러시아의 역사와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다. 하지만 개개인에 있어 이 날은 자신의 가족사와도 관계가 있다. ‘불멸의 연대’ 행진에 참가한 이유는 조국을 지킨 애국선열의 넋을 기리고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서다”라고 말했다.

서울에서 열린 '불멸의 연대'.출처: 알렉산드르 김/Youtube

그는 할머니 알렉산드라 필리포바의 사진을 들고 행진에 참가했다. 그의 할머니는 전쟁 중에 전방 병원에서 군외과의로 근무했다. 행사 조직에 참여한 알렉산드르 리모노프는 전쟁에 참가한 친인척의 초상화를 다 들려면 두 손으로도 부족했다고 토로했다. 그의 증조부 한 분은 전사했으며, 다른 증조부는 실종 상태다. 또 다른 두 분은 전쟁에서 살아남았지만 극도로 나빠진 건강 때문에 일찍 세상을 뜨셨다. 그래서 그들의 얼굴도 본 적이 없다.

그는 “나는 행진에도 참가하지만 3년 연속으로 조직위에도 참가하고 있다. 이유가 뭐냐고? 아마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게 ‘불멸의 연대’는 무엇보다 그 시절을 겪은 나의 조부, 증조부들의 기억을 되새기기 위한 것이다. 그들 중 전쟁을 피할 수 있었던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전쟁에 참가했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열린 승전기념일 행사에서 불멸의 연대 행진을 직접 본 이들은 하나같이 매우 따뜻하고 희망찬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포포바 회장은 “특히 진지한 얼굴을 하고 행진에 참가한 젊은이들, 어린 학생들과 아이들을 보았을 때 기분이 좋았다. 그것은 아마 영광스런 조상들에 걸맞는 새로운 세대가 자라나고 있다는 희망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