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쿠즈네초프는 6개 독일 방언을 할 줄 알았지만 상대방의 방언으로 출신지를 알게 되면 항상 다른 방언으로 바꿨다. 자신을 동향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을 독일인이라고 속인 첩보원은 사실 한 번도 독일에 가 본 적이 없어서 특정지역 주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소한 것들로 인해 쉽게 들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업적들이 비밀에 부쳐져 있는 다른 많은 공작원들과 달리 니콜라이 쿠즈네초프는 공개된 가장 유명한 인물중 중 하나다. 사실 쿠즈네초프의 일생에 관한 최초의 연구자인 알렉산드르 루킨과 테오도르 글랏코프(나중에 유명한 첩보기관 역사가가 됨)는 쿠즈네초프의 공식 경력에서 그의 출신과 1920년대 말의 체포 문제를 일부러 모호하게 만들었다. 쿠즈네초프는 이상적인 영웅은 아니었다. 엄청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으며, 그의 아버지는 백군을 지원했고 집단농장에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출처: 기록사진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출처: 기록사진

이와 동시에 다름 아닌 가족의 지위 덕에 고집 센 니콜라이는 시베리아에서도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그의 고향 마을 지랸카는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2200km 떨어져 있다). 부모는 그를 집에서 100km 떨어진, 훌륭한 교육자들이 가르키는 중등학교가 있는 작은 도시로 보냈다. 바로 여기서 그는 지역에 단 둘뿐인 독일인 약제사 및 산림보호원과 대화하고 독일어를 연습하면서 언어적 재능을 발휘했다.

그런데 1920년대 시베리아에는 훌륭한 언어학자가 필요하지 않았다. 쿠즈네초프는 기술학교에 입학했지만 ‘출신’ 때문에 졸업하지 못하고 목재 벌목 현장에서 일하러 코미로 떠났다. 그러나 이 젊은 전문가는 초반에 운이 없었다. 그는 공금을 횡령한 산림관구 지도부와 ‘동업’ 했다는 이유로 체포됐으며 1년의 교정노동을 선고 받았다.

수도로 가는 기나긴 길

니콜라이 쿠즈네초프에 대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첩보원의 공훈(Подвиг разведчика)’. 출처: Youtube

소련 붕괴 후 전기작가 테오도르 글랏코프는 “코미에서 일하는 동안 쿠즈네초프는 첩보기관의 시야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내무인민위원회 지부가 1년 만에 코미-페름어를 익히고 독일어를 완벽히 구사하는 청년에게 관심을 가진 것이다. 체키스트(반혁명 및 사보타주 퇴치 담당 전 러시아 비상 위원회 요원)들과 협력하기 시작한 니콜라이는 코미와 우랄에서 비밀리에 내무인민위원회를 위해 일하며 강도들을 소탕하고 지역으로 오는 외국인들을 조사했다.

탄압 때문에 내무인민위원회 중앙기구가 심한 인력 부족에 시달리던 1938년, 쿠즈네초프는 모스크바로 파견된다. 그는 극비 첩보요원이라는 매우 독특한 직위와 소련 독일인 루돌프 빌겔모비치 슈미트의 이름 앞으로 된 문서들, 소련 수도 중심부의 아파트와 일정한 활동의 자유를 얻었다. 수많은 히틀러 독일의 대표단이 전쟁전야의 모스크바를 방문했고 루돌프-니콜라이는 그를 같은 독일인이라 여긴 엔지니어, 군인, 외교관들과 능숙하게 관계를 맺었다.

독일인 루돌프 빌겔모비치 슈미트의 이름 앞으로 된 여권. 출처: 기록사진독일인 루돌프 빌겔모비치 슈미트의 이름 앞으로 된 여권. 출처: 기록사진

파괴공작원

전쟁 시작 무렵 소련에서 파괴활동의 위상은 높지 않았다. 소련 정부는 방어전이 아니라 공격전을 준비했다. 유명한 첩보기관 역사가 알렉산드르 콜파키디는 자신의 저서 ‘적후의 파괴공작 활동(Зафронтовая диверсионная работа)’에서 1941년의 정황을 탁월하게 묘사하는 내무인민위원회의 지시를 인용한다. ‘서로 알지도 못하고 무기도 다룰 줄 모르는 사람들로 급히 말 그대로 몇 시간 만에 분견대와 부대들이 구성됐다.’ 긴급히 새 구분대들이 만들어졌고 적후방 작업 전문가들이 영입되기 시작했는데 니콜라이도 그 중 하나였다. 한때 그는 포로수용소에서 ‘실습’을 하고, 1942년 여름에는 파울 지베르트 중위라는 신분으로 우크라이나 로브노 근교로 가게 된다.

한 번도 독일에 가 본 적이 없던 사람이 독일인 행세를 하기는 힘든 일이다. 쿠즈네초프는 항상 행동 하나하나를 통제해야 했다. 단순한 예로 맥주 세 잔을 주문할 때 러시아인은 바텐더에게 엄지와 검지, 중지를 보여주고 독일인은 검지와 중지, 약지를 보여준다. 대화를 하다 딴 생각에 빠져 실수를 하게 되면, 즉각 의심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쿠즈네초프는 독일 음주 문화를 멋지게 습득했고 다름 아닌 독일 소좌를 취하게 만들어 테헤란에서 반히틀러 연합국 지도자들에 대한 음모를 알아냈다. 알렉산드르 콜파키디가 쓴 바에 따르면 물론 ‘로브노의 바와 레스토랑을 돌아다니며 장교는 많은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지만 극비 사항은 아니었다’. 그러나 니콜라이가 보낸 사소한 것들은 분석가들을 거치며 장래 독일 계획의 정확한 그림을 만드는 데 사용됐다.

이와 병행해 위장 장교 지베르트(쿠즈네초프)는 로브노에서 평화시민에 대한 범죄에 책임이 있는 독일 고위 공직자들과 장교들에 대한 사냥을 진행한다. 그러나 1944년 초 니콜라이가 숙청의 파도를 끝내자 그를 의심한 독일의 고리가 죄어 오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대위로 ‘만들어’ 로브노에서 우크라이나의 르보프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다시 몇몇 떠들썩한 파괴공작을 하고 이어 그 도시를 떠나 동료가 있는 러시아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처음에 행운의 여신은 니콜라이 쿠즈네초프에게 미소를 보내는 것 같았다. 그와 동료들은 봉쇄초소를 돌파해 도시를 빠져 나오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전선 부근의 작은 마을 보라틴에서 쿠즈네초프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과 맞닥뜨린다. 전투 결과 쿠즈네츠프와 그의 동료들은 모두 사망한다.

출처: 타스출처: 타스여러 해가 지난 뒤 쿠즈네초프의 전 상관이었던 수도플라토프 장군은 자신의 회고록 ‘첩보와 크렘린(Разведка и Кремль)’에서 쿠즈네초프를 죽인 것은 ‘자신의 성공에 대한 과도한 믿음’이었다고 쓴다.( 회고록은 장군이 죽기 전에 썼다가 1996년 출판됐다.) 그러나 성공은 그저 그의 냉정함과 준비, 그리고 자신의 조국을 위해 투쟁하고자 하는 각오의 결과였을 뿐이다. 영화 ‘첩보원의 공훈’에서 그가 모델인 주인공이 ‘진정한 첩보원은 조국을 매우 깊이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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