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정교회의 일제 치하 서울 생존사

1910년에서 45년까지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일 때 서울에 갇혀 살던 러시아인들에게 러시아 정교회 선교단은 구심점이 됐다. 선교단은 러시아인들이 자신들의 삶과 관심사, 문제들을 논의하고 필요할 경우 이익 보호를 위해 단결할 수 있었던 사회적 교류 통로였다.
오피니언
 The Cathedral of Christ the Saviour
소련. 1931년 12월에 파괴된 모스크바의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 출처 : 타스

러시아 정교회 선교단은 1897년 서울에서 공식적으로 문을 열었다. 그러나 1917년 10월 혁명 이후 선교단은 정부 보조금을 받지 못하게 되면서 매우 불안한 상황에 놓였다. 1917-45년에 러시아 정교회 선교단의 공식 위치는 다소 불확실했다.

러시아 정교회 선교단은 주로 소유 토지를 임대해 받은 돈으로 살았지만, 가끔 일본 정교회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선교단은 사실상 일본 정교회에 종속됐지만, 운영에서 상당한 자율성을 가졌다.

그래서 요즘 교회 사학자들은 선교단이 식민지 통치 기간 내내 법률상으로는 모스크바 총대주교청의 일부로 남아 있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주장들이 오늘날 교회 정치의 복잡 미묘한 상황(이 점은 지면 관계상 여기서 논의하지 못한다)과 관련돼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적군과 백군

식민 당국은 러시아 정교회 선교단에 너그러운 태도를 보였다. 그들은 공산주의에 강력하게 반대하는 러시아 성직자들이 ‘적화된 러시아’와 대립하고 있는 일본에 매우 강력한 정치적 동맹은 아니더라도 유용한 동맹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식민 당국은 기독교 선교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따라서 선교단의 활동은 대부분 서울 거주 러시아 공동체에 집중됐다. 1920년대 서울의 러시아인은 2000~3000명 규모로 꽤 컸다. 1920년대 초에 반공 저항 운동 지지자 가운데 많은 사람이 싸움에 패하고 나자 한국으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1925년에는 일본이 소련과 수교하면서 소련 영사관이 서울에 설치됐다. 예상대로 선교단과 영사관은 적대적인 관계를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이들이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물리적 충돌, 특히 ‘적군’과 ‘백군’의 후예들 사이에서 충돌이 있었다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선교 활동

일본 식민 정부가 기독교 선교를 대체로 허용하지 않았는데도 선교단은 소규모 선교 활동을 계속 할 수 있었다. 1930년경에는 러시아 정교로 개종한 한국인이 1000명에 달했고 1930년대에는 수 백 명이 더 정교 신앙에 귀의했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일본 당국의 의심이 심해졌다. 사제들이 시골에 가서 대중을 만나는 일이 금지되면서 한국인들과의 접촉도 시들해졌다. 그럼에도 정교 기독교는 어느 정도 묵인됐다. 서구 개신교 사제들과 달리 정교회 사제들은 1941년 한국에서 추방되지 않았다.

1945년 한국이 독립하고 나자 모스크바 정교회 총대주교청은 선교단 통제권을 잠시나마 다시 손에 쥐었다. 당시 소련 정부는 정교회에 대한 철저하게 무신론적인 과거 태도를 상당히 완화했고 심지어 정교회를 미미하나마 유용한 동맹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정교회 당국이 민족주의 정치 동원에 이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에 남아 있던 작은 정교회 공동체는 냉전의 갈등에 시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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