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성지 카잔 성당

러시아의 북방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축물이 이 도시의 중심가인 넵스키 대로에 서 있다. 농노 출신의 건축가가 설계한 카잔 성당(Казанский собор)이 그것이다.

(사진제공=윌리엄 브룸필드)

모스크바 크렘린의 성당들처럼, 상트페테르부르크에도 웅장한 역사적 성지들이 많다. 그중 처음으로 지어진 것은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가 직접 건설을 지시한 성 베드로·바울 성당(Собор св. Петра и Павла)이다. 나중엔 크렘린의 아르항겔스키 성당(Архангельский собор)을 대신해 이곳이 황실의 묘소가 되었다.

하지만 성 베드로·바울 성당은 경비가 삼엄한 요새 안에 있었다. 도시가 세워지고 백 년이 지나도록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제국 수도의 영광을 과시할 수 있는 웅대한 건축미를 지녔으면서도 대중의 접근이 가능한 성당이 없었다.

그런 필요를 채워준 것이 1801년부터 1811년까지 10년에 걸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중심가인 네프스키 대로에서도 눈에 띄는 곳에 세워진 카잔 성당이다. 카잔 성당의 위치와 외관은 도시의 심장부를 장악할 수 있게 치밀하게 계획되었다.


확대지도로 본 카잔 성당의 모습

1780년대 초엔 미하일 젬초프(М. Земцов)가 설계한 검박한 외관의 '성모 탄생 교회(церковь Рождества Богородицы)'를 개축하려는 계획이 있었다. 이 교회는 기적의 힘을 가졌다고 여겨지는 '카잔의 성모 이콘(성상화)'이 보관된 곳이다. 많은 모사본이 제작된 카잔의 성모 이콘은 1579년 카잔 대화재 직후로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고 전해지며,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의 형상을 담은 러시아에서 가장 숭배 받는 이콘 가운데 하나이다.

17세기 초 이콘이 '동란의 시대(Смутное время)'라 불리는 황실의 분란으로부터 러시아를 구했다고 여겨지면서 이콘의 국가적 의미가 커졌다. 1721년 표트르 대제는 카잔의 성모 이콘의 초기 복사본을 새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 왔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에 박차가 가해진 것은 파벨 1세의 짧은 통치기간(1796~1801) 중이었다. 파벨 1세는 1798년 나폴레옹에 의해 몰타에서 축출된 성 요한 기사단의 단장이 되기도 했다.

가는 법

카잔 성당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카잔스카야 광장(пл. Казанская)에 있다. 지하철 '넵스키 대로'역에서 내리면 바로 보인다.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을 조화시키려던 파벨 1세의 생각이 카잔 성당의 모습에도 영향을 준 듯 성당 곳곳은 몰타 십자가로 장식돼 있다.

카잔 성당을 건축한 안드레이 보로니힌(А. Воронихин, 1759-1814)은 우랄 지역에 있는 스트로가노프 가문의 소유영지에서 농노로 태어났다. 러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이었던 스트로가노프 가문은 예리한 안목을 지닌 예술의 후원자였다. 이들은 보로니힌의 재능을 발견하고 1777년 모스크바로 데려와 건축가 바실리 바제노프와 마트베이 카자코프 밑에서 2년간 공부하도록 했다.

보로니힌은 1779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스트로가노프 서클에 들어갔고, 1786년에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1786년부터 1790년까지 알렉산드르 스트로가노프 백작의 아들인 파벨의 유럽 여행에 동행했다. 러시아로 돌아오기 전에는 파리에서 개인적으로 건축 실습을 받았다.

1799년 파벨 황제는 로마의 웅장함을 반영한 새로운 성당을 지을 건축가를 다시 모집하기 시작했다. 건축 위원회의 수장이 된 알렉산드르 스트로가노프는 즉시 보로니힌을 건축가로 선택했다. 보로니힌의 자격 여부가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지만, 보로니힌에 대한 스트로가노프의 믿음은 광대한 건축 사업의 조직과 압도적인 위용의 성당 설계를 통해 입증되었다.

카잔 성당은 라틴 십자가(세로대의 아래쪽이 긴 십자가) 모양으로 서쪽, 북쪽, 남쪽으로 코린트 양식의 열주 회랑이 있고 동쪽에는 반원형 애프스(apse)가 위치한다. 건물의 상단은 거대한 장식 난간으로 둘러싸여 있다. 애프스 위에 조각된 프리즈(frieze, 띠 모양의 장식물)에는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의 모습이 담겨 있다. 회랑을 이루는 기둥과 같은 기둥으로 떠받쳐진 돔(dome)이 성당의 머리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이 독특한 구조의 성당을 넵스키 대로와 조화롭게 배치하는 데는 기발한 해결책이 필요했다. 성당의 중심축(동서 방향)이 넵스키 대로와 평행을 이루었기 때문에 보로니힌은 북쪽으로 대로를 마주보는 웅장한 파사드를 만들고 동과 서 양쪽으로 육중한 기둥의 곡선형 열주 회랑을 배치시켰다. 당초 계획은 남쪽에도 같은 회랑을 건설하는 것이었지만, 현실로 실현되지 않았다. 서쪽 파사드의 중앙문은 북쪽 회랑에 가려졌다.

성당의 벽돌벽은 러시아 서북부 도시 갓치나 인근에서 채굴한 푸도스트(갓치나 인근 마을 이름)의 돌, 즉 투파 석회석으로 마감됐다. 투파는 채굴 직후엔 다루기 쉬우면서도 공기에 노출되면 서서히 경화되기 때문에 세밀한 조각에 제격이었다. 투파의 이런 성질은 회랑 입구, 애프스, 세 회랑의 부조에 성경을 주제로 한 대형 프리즈를 만드는 데 활용됐다.

네 줄로 늘어선 회랑 기둥의 주신과 주두도 투파로 만들어 졌으며, 세 종류의 화강암과 석회암, 대리석으로 된 다채로운 장식으로 꾸며져 있다. 회랑의 양쪽 입구에 세워진 블라디미르 성인과 알렉산드르 넵스키 성인 동상을 비롯해, 조각상 제작에는 청동이 쓰였다. 거대한 문들은 로렌초 기베르티가 피렌체 세례당에 쓰기 위해 만든 것과 비슷한 모양의 동판으로 덮여 있다.

화려한 실내는 신랑과 익랑을 구분하는 28쌍의 코린트식 기둥으로 나뉘어져 있다. 주신은 붉은 핀란드산 화강암을 연마해 만들었고, 주두의 재료는 금도금을 입힌 청동이다. 원통형 궁륭은 장미 무늬가 새겨진 육각형 조각으로 채워져 있다. 바닥은 주로 우랄 산맥에서 캐낸 석재로 만든 모자이크로 덮여 있다.

성당 내부의 중심은 돔 하단의 공간이다. 굵직한 기둥이 네 복음서의 저자가 그려진 펜덴티브(pendentive)를 받치고 있다. 돔 밑부분은 예수와 성모의 생을 주제로 한 조각처럼 보이도록 그린 회색조 프리즈(그리자이유, grisaille)로 꾸며졌다. 격천정 돔은 두 겹으로 이루어졌다.

프레스코화와 캔버스화로 구성된 실내 회화는 제국예술아카데미가 감독했다. 성화벽은 바실리 보로비콥스키와 유명한 화가 알렉산드르 이바노프의 아들 안드레이 이바노프 등 주로 아카데미 소속 화가들이 그렸다.

1811년 공사가 끝날 무렵, 카잔 성당은 국가적 성지가 될 위용을 갖추었다. 1812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이 이곳에 배치되었고, 1813년 7월엔 나폴레옹에 대항해 싸운 러시아 군대의 총사령관이자 톨스토이의 작품 전쟁과 평화의 주인공 미하일 쿠투조프 공작의 엄숙한 장례식이 치러졌다.

카잔 성당은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을 모델로 한 대형 고전주의 건물이며, 후에 자크 수플레의 파리 생트 준비에브 성당(팡테옹, 건설 기간 1755~1792)이 이 양식을 계승했다. 북쪽 회랑 덕에 카잔 성당은 장엄한 규모의 건축미와 개방된 공간을 동시에 가지게 됐다.

끝으로, 카잔 성당은 예카테리나(현 그리보예도프) 운하와 교차하는 지점에서 네프스키 대로와 만난다. 가로수길 맞은 편에 1902년부터 1904년 사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랜드마크 '싱거 빌딩'(현재는 돔 크니기(Дом книги)가 위치한 건물로 더 유명)도 성당과 나란히 넵스키 대로와 접하고 있다.

20세기 초, 보로니힌의 걸작 카잔 성당은 운하를 따라 또 하나의 성지 그리스도 부활 성당(Собор Воскресения Христова на Крови), 일명 '피의 성당'이 지어지면서 더욱 보완됐다. 이 성당은 1881년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한 장소에 세워졌다. 전혀 다른 양식과 외관의 두 성당은 로마노프 왕조와 러시아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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