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의 발자취를 따라서… 소치와 스탈린의 유령

스탈린 별장, 소치, 마체스타 (사진제공=로리/레기언메디아)

스탈린 별장, 소치, 마체스타 (사진제공=로리/레기언메디아)

어느날 문득 캅카스의 흑해 연안의 잠재성을 깨닫고는 이곳의 휴양시설을 재건하도록 지시한 사람은 바로 스탈린이었다.

모든 것은 1920년대에 스탈린이 마체스타 온천욕(ванны Мацесты)을 처음 해보고 시작됐다. 류마티즘 환자 였던 스탈린은 한 차례의 온천요법으로 바로 몸이 나아지는 것을 느끼자 소치를 자신의 휴가 및 요양지로 삼기로 결정했다.

흑해, 소치

1934년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소치의 인프라 건설에 당시 기준으로는 천문학적 금액이었던 10억 루블 이상이 할당됐다. 소치에는 스탈린의 이름이 붙은 간선도로(스탈린 대로)가 부설되었다. 현재 이 도로는 '휴양지 대로(Курортный проспект)'로 개명됐다. 상수도가 건설되고 공원들이 조성됐다. 수많은 요양소가 지어지기 시작했다. 스탈린이 황화수소를 함유한 온천수의 치료 효험 때문에 각별한 애정을 표시한 휴양지 마체스타의 현대화 작업도 물론 시작되었다.

(사진제공=로리/레기언메디아)
소치 수목원 (사진제공=로리/레기언메디아)

스탈린 별장

스탈린은 소치에 왔을 때 처음에는 가족과 함께 '미하일롭스코예' 영지에 머물곤 했다. 영지의 대저택 건물은 마체스타 협곡과 아구르 폭포군 사이 산등성이 위에 있었다. 해발 50미터의 영지 부지에 이후 스탈린의 다차 '젤료나야 로샤(Зеленая роща, 푸른 숲)'을 건설했다. 이 다차는 지금까지도 보존되어 현대식 요양단지 '젤료나야 로샤'에 포함된 박물관과 미니호텔로 운영되고 있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의 별장은 소련의 젊은 건축가 미론 메르자노프가 설계했다. 메르자노프는 스탈린의 취향을 완벽하게 예상해 자신의 설계도에 반영했다. 신선한 바람이 불어 올 수 있도록 다차는 바다와 산 바람이 자나가는 사방으로 트여 있었다. 정적과 평온함을 즐기던 스탈린은 별채에서 지냈다. 옆동은 행랑채로 그곳에 부엌이 있었는데 주방은 스탈린이 머물고 있는 별채의 창문에서 보이지 않는 쪽에 위치했다. 스탈린은 음식 냄새와 그릇 소리를 매우 싫어했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계단 사이사이가 너무 낮아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용하기가 심히 불편했다. 하지만 류마티즘 때문에 보폭이 작았던 스탈린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심지어 발코니 난간들도 나즈막하게 설계됐다. 스탈린이 거리의 일상들을 편히 지켜볼 수 있도록 배려해 놓았던 것이다. 여러 출처에 따르면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들의 평균 신장은 165센티미터였다.

건축가 메르자노프는 스탈린의 소치 별장을 위해 특수한 열쇠구멍을 고안하기도 했다. 건물의 고용인들이 위대한 지도자 동지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스탈린 별장, 소치, 마체스타 (사진제공=로리/레기언메디아)
스탈린 별장, 소치, 마체스타 (사진제공=로리/레기언메디아)

에메랄드빛 녹색으로 페인트를 칠한 영지의 전면부는 그 덕분에 주변 숲과 잘 어우러졌다. 지금도 이 건물은 지어졌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서 있다. 스탈린이 암살 공포에 시달린 것은 유명한데, 푸른 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녹색의 건물은 멀리서 보면 잘 눈에 띄지 않았다. 소치에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경호 준비는 상당히 철저하게 이뤄졌다. 스탈린은 대부분의 경우 전용 기관차를 타고 소치를 찾았다. 1번을 단 몇 개의 열차가 철도 선로를 전속력으로 질주했는데, 그중 하나에는 스탈린이, 나머지에는 경호대가 타고 있었다. 소치의 다차는 상시적으로 삼중밀집경계망에 의해 경호되고 있었다. 심지어 소파 같은 거실 가구도 만일의 사태가 터지면 총탄을 '막을' 수 있도록 특별주문에 따라 말총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리비에라와 가그라

소치에서 스탈린 암살 기도로 간주된 사건은 두 번 있었다. 첫 사건은 스탈린과 보로실로프가 미국산 고급 세단 뷰익을 타고 리비에라 다리를 건너던 1931년 8월 25일에서 26일로 넘어가는 밤에 일어났다. 다리위에서 스탈린이 탄 관용 차량이 트럭과 충돌했고, 이에 경호대는 트럭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트럭 운전수는 자취를 감췄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운전수는 음주운전 중이었고 소련 인민의 지도자를 암살할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두 번째 사건은 그로부터 한 달 후 스탈린이 바다에서 보트를 타고 있을 때 일어났다. 소치에서 머지 않은 압하지야의 휴양도시 가그라 해변으로부터 누군가가 스탈린이 탄 보트를 향해 소총 사격을 가했다. 경호원이 스탈린을 보호하려고 몸을 날렸는데 그럴 필요도 없었다. 총알이 모두 빗나가 사상사는 전혀 없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스탈린의 보트가 지나간다는 사실을 아무도 국경초소에 알려주지 않아서 부대 지휘관이 세 차례의 경고사격을 한 것뿐이었다.

(사진제공=로리/레기언메디아)
(사진제공=로리/레기언메디아)

1930년대 무렵 이미 소치는 단순한 소련의 대표 휴양지가 아니었다. 수백만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대한 결정들이 이곳에서 내려졌다. 1941년 6월 22일 스탈린은 공식적으로는 모스크바에 있었다. 그런데 최근 영국 역사학자들은 자국 정보기관 자료를 인용하여 소련군 최고 사령관 스탈린은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비극의 날에 소치에서 휴양 중이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물론 소치에서 영국 스파이의 눈에 포착된 것은 스탈린의 대역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스탈린에게는 네 명의 대역이 있었다고 한다.

소독전쟁 중 소치의 스탈린 다차 '젤료나야 로샤'에는 스탈린의 가족이 살았다. 스탈린 자신은 소련 전역이 승리의 축포를 터뜨리고 있던 1945년에 이미 남부 별장으로 돌아와 있었다. 당시 이미 그는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뇌졸중을 겪은 직후 세 명의 의사가 스탈린을 전담 관찰했다. 그리고 다시 마체스타 온천욕을 하고 소치의 신선한 바람을 쐬며 별장 주변의 그늘진 가로수 길을 걸었다. 스탈린은 저녁마다 영화관에서 흑백영화 '볼가, 볼가'와 '채플린'을 보곤 했다. 스탈린은 다차에 손수 나무들을 심었고 레몬과 감귤 나무가 열매를 맺자 그 모습을 보고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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