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브게니야 메드베데바, 패배 없는 2년

헬싱키에서의 2017년 세계피겨선수권

헬싱키에서의 2017년 세계피겨선수권

로이터
지난 2년간 출전한 모든 대회에서 상을 죄다 휩쓴 열일곱 살 러시아 피겨 스타 예브게니야 메드베데바가 러시아 스포츠를 상징하는 간판스타로 자연스럽게 등극했다.

“Le roi est mort, vive le roi! (국왕 서거, 신왕 만세!)“피겨 스케이트 계에 새로운 권력이 탄생했다. 이 샛별의 기술과 침착함을 보고 세계적인 피겨 챔피언들도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팬들은 그를 '치마 입은 플류센코'라고 부른다. 2017세계 피겨선수권 여자 싱글(핀란드 헬싱키)에서 거머 쥔 금메달은 열일곱의 예브게니야 메드베데바가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로 탄탄한 입지를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묘한 우연의 일치겠지만, 메드베데바가 권좌를 차지한 바로 그 날 예브게니 플류센코가 은퇴를 공식 선언한다. 2000년대에는 맞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기량이 뛰어났던 플류센코는 2014년 소치동계올림픽에서 입은 허리 부상 때문에 그 후로는 사실상 대회에 출전하지 못했다. 이제 그는 믿음직한 후배 선수에게 바통을 물려주고 무대를 떠났다.

천하무적 메드베데바

메드베데바는 친한 친구인 하뉴 유즈루와 서로에게 장난감을 선물했다.

2년 동안 범접하기 힘든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는 상황을 보면 메드베데바가 앞으로 오래 갈 탄탄한 실력을 갖춘 선수라고 누구나 생각할 것이다. 두 시즌에 걸쳐 경쟁자들에게 그 어떤 기회도 허용하지 않으면서 메드베데바는 러시아 대회부터 세계 선수권대회에 이르기까지 출전한 모든 경기에서 받을 수 있는 상은 다 휩쓸었다. 그의 유일한 패배(2위를 패배라고 할 수 있다면)는 2015년 1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2014-2015 시즌 국제빙상경기연맹(ISU) 피겨스케이팅 그랑프리 시리즈 4차 대회 은메달이다. 이 경기에서 러시아 선수 옐레나 라디오노바가 메드베데바를 누르고 금메달을 차지했다.

세계의 이목이 소치동계올림픽에서 떠오른 신예 스타들의 선명한 이름에 아직 집중돼 있던 2015-2016 시즌에 메드베데바가 어디선가에서 느닷없이 등장했다. 스포츠 전문가들과 팬들이 러시아 여자 신동들의 출현에 주목하고, 율리야 리프니츠카야와 아델리나 소트니코바의 멋들어진 경기와 국제빙상경기연맹(ISU)피겨 그랑프리 시리즈 10월 대회 'Skate America'에서 그들이 어떤 경기를 펼칠지를 논하던 때, 새로운 러시아 이름 하나가 세계를 강타한다. 시니어 대회에 턱걸이로 출전할 수 있는 나이인 열다섯 살 곱슬머리 소녀가 미국 위스콘신주 밀워키에서 열린 2015-2016 국제빙상경기연맹(ISU) 피겨스케이팅 시니어 그랑프리시리즈 대회에서 미국 피겨 스케이팅의 간판 그레이시 골드, 일본 선수 미야하라 사토코, 바로 그 '붉은 코트를 입은 소녀' 율리야 리프니츠카야 등 모든 선수를 아주 가볍고 말끔하게 제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모스크바에서 온 여학생

예브게니야 메드베데바가 헬싱키 세계 피겨선수권 전에 연습하는 모습

당시 여학생 메드베데바가 누군지 러시아 사람들도 아는 바가 없었다. 대회 후에 진행된 일련의 인터뷰에서 이 샛별로 떠오른 여학생은 모스크바에 살고 있으며, 매일 지하철을 타고 연습하러 다니고, 훈련 때문에 학교 수업은 자주 빠지며, 그림 그리기와 수놓기를 좋아하고, '닥터하우스'와 '셜록'을 꼭 챙겨보고, “리프니츠카야와 비교당하면 정말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털어 놓는 소녀라는게 밝혀졌다.

제냐('예브게니야'의 애칭)에게도 우상이 있는데 피겨 선수는 아니고 한국의 아이돌 그룹 엑소이다. 'R-sport'와의 인터뷰에서 메드베데바는 “내 플레이리스트는 거의 엑소 노래가 채운다. 만약 어느 날 우연히 엑소 멤버들을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게 된다면 내가 무슨 행동을 어떻게 할지 상상도 못 하겠다. 아마도 같이 사진을 찍고 사인을 받을 것 같다. 손으로 살짝 건드려보면서 느낌을 음미하지 싶다”라고 말하며 큰소리로 웃는다.

예브게니야 메드베데바가 EXO의 'Lotto'곡을 들면서 춤추는 모습

“나는 원래 다양한 음악을 좋아하지만 지금은 케이팝(K-pop)만 듣는다. 나를 케이팝 팬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맞다. 나는 엑소의 열렬한 팬이다. 엑소에게 일어나는 일에 나는 항상 귀를 쫑긋하고 있다. 매일 아침 엑소의 음악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신곡이 나와 듣게 되는 날은 온종일 기분이 좋다. 그리고 엑소 멤버들은 내게 엄청난 동기부여를 한다. 그렇게 춤을 추면서 동시에 노래할 수 있으려면 평소에 얼마만큼 연습해야 할지 내가 알기 때문이다. 나는 엑소 멤버들에게 경탄한다”고 잡지 'Atime'과의 인터뷰에서 제냐가 털어놓았다.

빙판 위의 제냐는 자기 확신이 강하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우아하다. 쉽지 않은 일이다. 아마도 피겨스케이트 계의 환상적인 2인조인 알렉산드르 줄린 코치와 안무가 일리야 아베르부흐가 제냐와 같이 훈련해서일 것이다.

메드베데바에게 건 기대는 100% 보상 받았다. 처음으로 출전한 시니어 시즌의 결과만 보더라도 그렇게 완벽한 여자 피겨 선수는 러시아에 지금껏 없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예브게니야는 그랑프리 대회, 유럽 선수권대회, 세계 선수권대회 등 모든 중요한 대회에서 상을 휩쓸며 선두 자리를 지켰다. 미국 메사추세츠주 보스턴 ISU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프리스케이팅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목에 건 메드베데바는 주니어대회에서 우승한 후 이듬해에 시니어대회 시상대의 가장 높은 곳에 오르는 쾌거를 올린 세계 유일한 여자 피겨 선수가 되었다.

강철 멘탈

2016년 4월 3일, 보스턴 피겨 세계선수권. 출처: 유스케 나카니시/ Global Look Press2016년 4월 3일, 보스턴 피겨 세계선수권. 출처: 유스케 나카니시/ Global Look Press

그 다음 시즌에서 메드베데바가 반짝스타가 아니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게다가 코치가 교체되었어도 성적에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았다. 율리야 리프니츠카야의 코치였던 에테리 투트베리제가 알렉산드르 줄린 코치의 후임으로 왔다. 메드베데바는 헬싱키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피겨 여자 싱글 쇼트와 프리프로그램에서 세계 신기록을 다시 갈아치우며 우승을 차지하는 것으로 피겨 역사에 굵은 획을 그으며 출전할 수 있는 모든 대회에서 또다시 상을 휩쓴다.

메드베데바 우승의 일등공신은 놀랄만한 심리적 안정감이라고 예브게니 플루쉔코의 코치 알렉세이 미신이 말한다. 그는 'R-sport'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제냐의 점프나 회전 기술 때문에 놀라는 것이 아니다. 내가 감탄하는 지점은 제냐 내면의 자신감이다. 제냐를 보고 있으면 정말 황홀하다!”고 말했다.

예브게니야 메드베데바. 9월 11일 테러에 사망한 친구에 대한 프리프로그램. 출처: Youtube

짬이 날 때 일본어를 배우는지, 한국어를 배울 계획이 있는지를 묻자 메드베데바는 “한국어까지 배우기 시작한다면 내 머리는 아마 터져버릴 거다. 하지만 여자 친구 한 명이 서울에 살고 있기도 해서 한국어를 배울 때가 조용히 다가올 것 같다”고 대답했다.

“빙판에서 나는 사람이 아니라 선수다. 내게는 감정을 제멋대로 풀어놓을 권리가 없다”고 메드베데바가 말한다. 너무 신통하다. 하지만 자신에게 집중하도록 숙달되면 훈련이든, 대회든 간에 메드베데바가 스스로 만족할만한 성과를 얻게 된다고 타티야나 타라소바 코치가 귀띔한다.

애니메이션과 SNS

메드베데바가 빙판에서 로맨틱한 형상을 연기한다면 알렉상드르 데스플라(Alexandre Desplat)가 작업한 <2001년 9월 11일>의 심금을 울리는 OST를 지난 시즌 프리프로그램의 배경음악으로 선택했다), 현실에서 그는 서슴지 않고 완전히 평범한 청소년이 된다. SNS를 통해 많은 이들과 사귀는 그는 러시아판 페이스북인 브콘탁테(VK)의 한 피겨스케이트 그룹을 얼마 전까지 관리하기도 했다. 직접 털어놓은 바에 따르면 제냐는 자신에 관한 댓글을 즐겨 읽기도 하고 악플이 달려도 그리 괘념치 않는다.

예브게니야 메드베데바의 쇼트프로그램. 출처: Youtube

“사람이라면 모두 댓글을 쓸 수 있다. 쓰고 싶은 걸 쓰는 거다. 달리는 댓글이 때때로 얼마나 황당한지! 배를 잡고 웃을 때도 있다! 캐나다 대회를 마치고 나니 누군가 이런 댓글을 달았더라. '열여섯 살짜리 여자애가 그런 일을 왜 하나? 피겨는 인제 그만 두고 학교 다니면서 보르시(러시아에서 가장 즐겨 먹는 국) 끓이는 법을 배우는 게 낫겠다!' 그 댓글을 읽었을 때 나는 생각했다. '맞아, 중요한 게 보르시라면 나는 뭐를 위해 스케이트를 타고 있지?'” 'Sports.ru'와의 인터뷰에서 메드베데바가 들려줬던 이야기이다.

일본과 연관된 모든 것에 메드베데바는 열광한다. 특히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 일본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하여 메드베데바가 '세일러문' 만화 주제가 가사를 읊었을 때 일본 열도 전체가 이 어여쁜 피겨 선수에게 반한 듯 보였다. 4일 현재 그의 인스타그램에 달린 댓글 두 개 중 하나는 일본어로 되어 있다. 메드베데바는 '세일러문'이나 러시아 피겨선수가 주인공인 일본 애니메이션 '유리 온 아이스' 코스프레를 하며 자신의 팔로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 메드베데바 “여자 피겨는 남자 피겨처럼, 남자 피겨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 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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