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에스에스에르’, ‘까페에스에스’, ‘카게베’... 약어를 모르면 이해하기 힘든 러시아 현대사

(일러스트=니야즈 카리모프)

(일러스트=니야즈 카리모프)

다른 언어들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어도 이미 오래 전부터 단어들을 줄여 만든 약어들을 사용해왔다. 약어는 특히 정치 이데올로기 분야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따라서 러시아의 정치 체제에 대해 말할 때는 이러한 약어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1917년 혁명 직후 러시아는 더 이상 러시아가 아니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Российская Советская Федеративная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ая Республика)의 약어인 '에르에스에프에스에르(РСФСР)'로 불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혁명을 피해 해외로 이주한 이민자들은 이러한 국호를 인정할 수 없었고, 대신에 '소브데피야(Совдепия)'라는 풍자적인 이름을 붙였다(혁명 후 핵심 권력기관이었던 '대표자 소비에트(Советы Депутатов)'를 줄인말). 캅카스와 중앙아시아에 소비에트 권력이 마지막으로 수립된 이후에는 몇 개의 공화국이 '에르에스에프에스에르'로 편입되었고, 1924년 말부터 새로운 혁명 국가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이 되면서 그 약칭인 '에스에스에스에르(СССР)',즉 '소련'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이 명칭은 1991년 말 소련이 15개 독립국가로 분열되기 전까지 존재했다(88 서울 올림픽 당시 소련 선수단 유니폼에 쓰여진 '에스에스에스에르(СССР)'를 보고 '시시시피(CCCP)'는 어느 나라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았다. - 편집자주).

이와 동시에 러시아는 역사적인 명칭을 회복했다. 하지만 '에르에프(РФ, 러시아연방의 약자)'라는 약칭도 법적으로 동등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한편 주기적으로 소련이 무너진 폐허 위에 새로운 연합체를 만들려는 시도가 등장했고, 그 명칭은 '에스엔게(СНГ, 독립국가연합, CIS)'나 21세기 초 창설된 '예브르아즈에스(ЕврАзЭС, 유라시아경제공동체)처럼 약어로 불렸다.

국제적 약칭들 중에서는 번역을 거치지 않고 자역(transliteration)을 통해 러시아어로 들어온 것이 일부 있다. 예를 들면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영어 약어인 나토(NATO)는 러시아어로도 똑같이 나토(НАТО)로 불리며 영국 라디오 방송 BBC도 그대로 '비비시(Би-би-си)'라 불린다. 흥미로운 것은 ВВС를 키릴 문자로 읽게 되면 '공군'을 가르키는 '베베에스(ВВС)'가 된다.

정당 명칭도 전통적으로 약어로 부른다. 소련은 '카페에스에스(КПСС)'라 불린 소련공산당 일당체제 국가였다. 하지만 1950년대 초까지 소련공산당은 '전연방볼셰비키공산당'을 뜻하는 '베카페베(ВКП(б))'로 불렸다.

페레스트로이카 시절 등장한 최초의 '대안' 정당은 지니놉스키가 이끄는 '엘데페에르(ЛДПР)' 또는 '러시아자민당'이었다. 또 최근 야당 중 하나는 약칭 '파르나스'(그리스의 산 이름)인데 이는 '국민의 자유 당(Партия народной свободы)'을 줄여 동음이의의 말장난을 한 것이다.

1917년 창설된 '반혁명과 투기, 사보타주 퇴치 전러시아 비상위원회'는 줄여서 '베체카(ВЧК)'라 불렸고, 그 직원들은 '체키스트((чекист)'라 불렸다. 이후 이 탄압 기관은 여러 번 개명을 거쳤는데, 각기 다른 시기에 걸쳐 '엔카베데(НКВД, 내무인민위원회)', '엠게베(МГБ), 세계에서 가장 유명할 것이 확실한 '카게베(КГБ, 국가보안위원회, KGB)'로 불렸다. 현대 러시아에서 그 이름은 '페에스베(ФСБ, 연방보안국)'으로 바뀌었다. 흥미로운 점은 거의 백 년이 지났는데도 이 기관 직원들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체키스트'가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1970년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장편소설 '수용소 군도(Архипелаг ГУЛАГ)가 출판된 이후 '수용소 총국(Главное Управление Лагерей)'의 약칭인 '굴라크(ГУЛаг)'가 전세계에 알려졌다. 소련 시절 수용소와 관련해 등장한 또 다른 약어로는 실형을 선고 받고 수감된 사람들을 일컫는 '제크(зэк)'가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활동했던 '방첩총국(Главное Управление контрразведки)'은 '스메르시(СМЕРШ)'라고 불렸는데, 이는 '간첩들에게 죽음을!(Смерть шпионам!)'이라는 구호를 줄여서 만들어졌다.

현대 러시아에서 '게베(ГБ, 국가 보안)'라는 약칭은 소련 시절 풍겼던 으스스한 억압적인 뉘앙스를 상실했다. 가령, 현재 '에르게베(РГБ)'는 크렘린 근처에 있는 러시아 최대의 '러시아국립도서관'을 가리키는 공식 명칭이다. 도서관 앞 지하철역이 1930년에 붙여진 '레닌 기념 도서관(Библоитека имени В.И. Ленина)'이란 이름을 지금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러나 또 다른 지하철역에서는 역설적인 명칭 변형이 일어났다. 1939년 모스크바 북부의 한 지역에 개장한 '전소련농업박람회장'은 '베에스하베(ВСХВ)'라는 약칭으로 불렸다. 1950년대 말에는 이곳까지 지하철 노선이 개설되면서 이곳 지하철역도 '베에스하베역'으로 불렸다. 하지만 곧이어 박람회장이 '인민경제성과박람회장' 줄여서 '베데엔하((ВДНХ)'로 개명되면서 지하철역도 그 뒤를 따랐다. 소련 붕괴 이후 박람회장은 이념적 하중을 털어내고 평범한 상가 단지로 변했고 이름도 '전러시아박람센터' 줄여서 '베베체(ВВЦ)'가 됐다. 하지만 지하철역은 여전히 '베데엔하'로 불리며 동네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굳어졌다. 따라서 요즘은 '베베체'에 가려면 '베데엔하'로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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