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가족을 소중히 여기며 ‘탑을 만든 사람들’ ,잉구시인

‘제이라크’ 내(內) 탑 밀집 지역의 사진

‘제이라크’ 내(內) 탑 밀집 지역의 사진

사이드 자르나예프/ 리아 노보스티
잉구시인은 코카서스에서 가장 높은 가족의 탑으로 유명하며, 스탈린의 억압, 오세티아와의 무장 충돌, 체첸 전쟁을 견뎌 내고 유럽 및 러시아 대도시에 많은 디아스포라를 형성했지만, 아직도 수공업이나 장사를 할 줄 모른다.

잉구세티야의 ‘제이라크스키’는 해발 1200~2000m에 달하는 산악지역이다. 이곳의 산들은 그 어떤 백과사전보다 잉구시 사람들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 줄 수 있다.

200여 개 고대 건축물들이 밀집돼 있는 이곳엔 잉구시 사람들이 만든 유명한 가족의 탑이 있다. 탑이 가장 밀집된 지역은 ‘에기칼’로 40개 이상이 있다. 여기엔 스토리가 있다. 몽골이 북 카프카스를 침략한 14세기, 주변의 높은 산들은 이 민족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그 당시 평원에서 산악 지역으로 피난을 떠난 잉구시 사람들은 가족의 탑을 만들었고 그 옆에 집을 지었다. 그리고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조상의 무덤을 두었다.

태국에서 쉴 것인가, 아니면 새 문을 달 것인가?

잉구세티아 국가의 작사자이자 ‘제이라크스키’ 지역 가이드인 람잔 추로프는“많은 잉구시 사람들이 지금도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데 이는 당연한 현상이에요, 왜냐하면 이곳에는 실업률이 높고(30%이상으로 러시아에서 가장 높다) 월급이 많지 않기 때문이죠”라고 말한다.

캅카스 산맥. 출처: 미하일 자파리제/ 타스캅카스 산맥. 출처: 미하일 자파리제/ 타스

그는 이어 “민족 성격도 한 원인이예요. 우리는 아르메니아인이나 아제르바이잔인들처럼 장사를 할 줄 몰라요. 기본적인 수공업 기술도 없지요. 우리 공화국에서는 농업을 하는 게 제일 나아요” 라고 덧붙였다.

대다수의 잉구시 사람들은 늘 가난하게 살았다. 하지만 그들을 버티게 해 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단결력이었다.

“우리는 대가족이에요, 가족 구성원이 많고, 모두가 서로를 도와 주죠. 예를 들면 잉구시인들은 대부분의 코카서스인들처럼 큰 집을 좋아해요. 태국에 휴가 가는 것과 새 문을 다는 것 중에 제가 무엇을 선택할지 물어 봐 주시겠어요? 저는 당연히 새 문 다는 것을 선택할 거에요. 집 한 채를 짓는 일에 어린아이에서부터 할아버지, 할머니로 구성된 대가족이 모두 나설 수 있답니다. 집을 짓는 데는 몇 년이 걸려요. 이런 단결력이 없다면 우리는 살아남지 못했을 거에요..."

람잔 추로프는 “스탈린 집권때 잉구시인을 추방한 일이 큰 타격을 주었다”묘 “유형 중 대다수가 죽었어요. 사람들은 다른 모습으로 돌아왔죠. 슬픈 우스갯소리가 있었어요. 잉구시 대표단이 도움을 청하러 크렘린궁에 갔는데, 그들 중 두 명은 절름발이고 한 명은 팔이 없었다는 이야기에요. 억압으로 인해 민족의 아름다움이 상실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이제는 새로운 세대가 태어나고 있고 그들에겐 이런 ‘아픔의 상처’가 없어서 다행이에요”라고 말했다.

잉구세티아 국가의 작사자이자 ‘제이라크스키’ 지역 가이드인 람잔 추로프. 사진 제공: Press photo잉구세티아 국가의 작사자이자 ‘제이라크스키’ 지역 가이드인 람잔 추로프. 사진 제공: Press photo1944년 카자흐스탄으로의 추방은 잉구시 민족의 운명에 큰 영향을 주었다. 독일인들과 협력했다는 죄목으로 다른 코카서스 민족들과 더불어 강제 이주를 당했지만 잉구시 인들은 다른 코카서스 민족들보다 더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고 여겨진다. 1957년 강제 이주지에서 귀환하고 및 명예 회복도 이뤄졌지만 그들의 땅은 부분적으로 오세티아인들에게 점령됐기 때문이다. 1992년 오세티아와 이구세티아의 유혈 충돌은 안그래도 적은 잉구시 인들을 다른 공화국이나 러시아 및 유럽의 대도시로 흩어지게 만들었다.

잉구시 인들은 대다수 북 코카서스 민족처럼 이슬람 교도다. ‘잉구시’란 말의 뜻은 ‘탑의 사람들’이란 뜻이다. 잉구세티야는 북 코카서스에서 가장 작은 공화국으로 면적이 3685㎢이며 수도는 마가스다.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을 역사적 유산인 가족의 탑 만들기를 가능케 해 준 잉구시 인들의 특성을 람잔 추로프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민족의 성향 중엔 ‘남들보다 못하지 않기’가 있어요. 예를 들어 이웃이 아름다운 문이 달린 집을 지으면 저도 그에 못지않게 지어야 하는 거죠. 이런 식으로 가족의 탑이 생겨난 거에요. 고된 일이었죠. 산 위로 무거운 돌들을 가져와야 했으니까요. 지금 공화국에 있는 모든 탑들이 예전 모습을 다 간직하고 있지는 않지만, 가족의 탑은 각 집마다 있었고, 그 어느 집도 탑 짓기를 마다하지 않았어요.”

잉구시 민족의 디아스포라

자선 재단 ‘테샴’의 설립자인 하산 날기예프. 사진 제공: Press photo자선 재단 ‘테샴’의 설립자인 하산 날기예프. 사진 제공: Press photo

잉구시 사람으로 기업가이며 자선 재단 ‘테샴’의 설립자인 하산 날기예프는 “거의 모든 잉구시인들이 모스크바에 친척을 두고 있어요. 마가단 주(러시아의 극동 지역)에 대규모 디아스포라가 있는데, 옛소련 시절과 90년대에 우리 민족 사람들이 그곳에서 금을 채취하거나 나무를 가공하는 일을 했지요. 많은 잉구시인들이 러시아 북부의 정유 산업 시설에서 일하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약 70만 명의 잉구시인들이 집계되고 있는데 이들 가운데 37만 5천명 만이 고향인 잉구세야에서 살고 있다. 유럽의 여러 나라에 흩어진 잉구시 인들의 수에 대한 공식 자료는 없지만 현지 거주자들의 말에 따르면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민 가는 국가가 벨기에다. 해외에서 가장 큰 규모의 디아스포라는 터키에 있는데 약 8만 5천 명 수준이다.

서비스 마인드 제로

‘제이라크스키’ 지역은 잉구세티야에서 관광지로 기대되는 곳이다. 최근 이곳에 관광객들을 위한 스키 리조트 ‘아름키’와 열 개의 호텔이 건설되었다. 매년 관광객의 유입이 늘어나는 추세이다. 2016년 초 잉구세티야를 방문한 사람이 3만9400명으로, 2015년 대비 24%가 늘었다. 단 서비스 분야의 일손이 부족한 상황이라는 점이 아쉽다.

람잔 추로프는 “잉구시 남자들은 서비스 분야를 좋아하지 않고, 또 서비스 마인드도 없어요. 원래 그래요. 우리에겐 그런 분야가 낯설어요. 운전 기사, 경비, 차장으로 일하는 건 괜찮은데, 종업원은 비천하게 여기는 직업이에요. 여기 카페와 호텔에 종업원으로는 오세티아인이, 요리사로는 아제르바이잔인이 종종 일해요. 실직자라도 종업원 자리는 거절하는 경우가 자주 있지요”라고 말한다.

>> 축치족에게 죽음은 비극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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