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 과학도시 ‘아카뎀고로도크’...소련이 남긴 마지막 유토피아인가 아니면 새로운 ‘실리콘 타이가’인가?

1988년. ‘아카뎀고로도크’ 시베리아 과학도시의 조망. 프로스펙트 아카데미카 라브렌찌예바 거리.

1988년. ‘아카뎀고로도크’ 시베리아 과학도시의 조망. 프로스펙트 아카데미카 라브렌찌예바 거리.

리아 노보스티
시베리아 심장부에 위치한 과학도시 ‘아카뎀고로도크’... 어쩌다 러시아의 지적, 정신적, 문화적 힘이 이곳에 집결됐을까?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이 과학단지에서의 오늘날 삶은 어떨까? 소련 붕괴 직후 있었던 엄청난 두뇌 유출 사태가 이제는 없을 것이라고 이곳에서 믿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베리아의 과학도시 아카뎀고로도크는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의 지시로 ‘해빙’의 바람이 한창이던 1957년에 조성됐다. 당시는 소련에서는 과학의 무한한 가능성과 과학자들의 특별한 사명에 대한 믿음이 지배적이었다. 과학도시인 아카뎀고로도크는 노보시비르스크에서 30km 떨어진 곳에 조성되었는데 당시 이곳은 연구활동보다는 북극곰에게나 어울릴만한 장소였다. 이곳은 1년 중 거의 절반이 겨울이다. 10월부터 4월까지가 겨울이고 기온이 영하 40℃ 이하로 떨어지는 날도 드물지 않다. 오늘날 이곳의 학자들이 어떻게 살고 있으며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이야기를 아카뎀고로도크에서 태어나 자란 마리나 모스칼렌코 Russia포커스 기자가 취재했다.

‘두뇌 유출 금지’

출처 : 테크노파크 공보실출처 : 국립노보시비르스크대학교공보실

소련이 붕괴하고 1990년대에 러시아 학자들이 해외로 대거 이주한 사실을 상기시키려는 듯 아카뎀고로도크에 있는 테크노파크 주변에는 ‘두뇌 유출 금지’라고 쓴 도로 표지판이 곳곳에 서 있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핵물리학연구소의 파벨 크로코브니 박사는 “내 동료 중 많은 이들이 해외 근무 경력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다. 우리는 여러 국제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으며, 일본 쓰쿠바 고에너지물리연구소(KEK), 유럽원자핵공동연구소(CERN)와도 협력하고 있다. 쓰쿠바는 사실상 일본판 노보시비르스크 아카뎀고로도크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물리학자인 크로코브니 박사의 의견에 따르면, 시베리아의 겨울은 스키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천국과 같다. “연구소에서 5분 거리에 스키장 시설과 피스트가 있다. 점심시간에 여유가 있을 때면 스키를 타러 간다”고 그는 말한다. 여름이 오면 과학자들은 연구활동을 하다 틈이 날 때 까치밥나무에 물을 주거나 자신의 텃밭에서 풀을 뽑는다.

자유를 찾아 시베리아로

출처 : 국립노보시비르스크대학교 공보실출처 : 국립노보시비르스크대학교 공보실

1960년대에 많은 과학자들이 이곳 시베리아 아카뎀고로도크로 자발적으로 이주했다. 소비에트 국가의 수도를 떠나 멀고 먼 야생의 숲을 찾아서 말이다. 당시 국내 다른 지역에서는 꿈도 꿀 수 없었던 지적 자유를 찾기 위한 이주였다.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온 과학자들이 공사장이나 숲 속에 있는 차고 속에 자신들의 첫 연구실을 만들었다. 이렇게 탄생한 아카뎀고로도크는 전체주의적 법에 따라 사는 데 익숙했던 나라에서는 놀랄만한 실험이었다.

아카뎀고로도크 안에서는 소련에서 박해받던 음유시인들의 콘서트가 열리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미하일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 같은 금서(禁書)가 자유롭게 읽혔다. 스탈린 시대에 사이비 과학으로 낙인 찍혔던 유전학도 여기서 다시 소생했다.

길들여진 여우

출처 : 세포학유전학연구소 공보실출처 : 세포학유전학연구소 공보실

소련의 유전학자 드미트리 벨랴예프가 야생동물을 가축화하려는 생각을 실현한 곳도 바로 이곳 아카뎀고로도크였다. 소련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지부 세포학유전학연구소(ИЦиГ) 연구진은  개처럼 살갑게 행동하는 길들여진 여우 품종을 만들어냈다. 지금까지 연구소 사육장에서 태어난 길들여진 여우는 50세대에 달한다.

현재 이렇게 길들여진 여우들은 여러 전시회나 촬영작업에 활용되고 있다. 최근에 여우 한 마리가 영화 촬영장을 탈출해 사라진 적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사라진 여우를 찾는 작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유전공학적으로 길들여진 개체가 대도시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매우 적다. 이때문에 아카뎀고로도크 전체가 여우의 안전을 걱정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아카뎀고로도크 내에서 이따금 여우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아직 살아 있고 밤에만 숲 속을 돌아다니는 것으로 보인다.” 여우의 주인인 이리나 무하멧시나가 Russia포커스에 말했다.

모스크바는 멀고, 혁신은 가깝다

출처 : 국립노보시비르스크대학교 공보실출처 : 국립노보시비르스크대학교 공보실

“이곳, 아카뎀고로도크에는 연구 활동을 하고 신기술을 개발하기 위한 모든 조건이 갖추어져 있다.” 국립노보시비르스크대학교의 빅데이터 분석 프로젝트 팀장인 예브게니 파블롭스키는 말한다. 인공지능 개발 업무를 담당하는 그는 인간 친화적이며, 세계를 더 깊게 인식할 수 있도록 돕는 인공지능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시베리아 학자들은 지금도 정신적, 물리적으로 모스크바에서 먼 곳에 있다. 이들은 자기 길을 스스로 개척하는 것에 익숙하다. “우리는 국가가 나서서 우리 일을 해결해줄 때를 기다리진 않는다”라고 파블롭스키 팀장은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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