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수용소 생존자가 말하는 2차 대전 파시즘의 참상

(사진제공=개인 보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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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벨 마크로비치 루빈치크는 스스로를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나치수용소와 게토를 거친 후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설립한 그가 Russia포커스에 자신의 옛 기억과 함께 수차례 기적적으로 죽음을 면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파벨 마르코비치가 처음으로 전쟁을 접한 것은 13살 때의 일이었다. 전쟁 발발 이틀 전 아직 어렸던 그는 현 벨라루스의 수도인 민스크 인근의 피오네르 캠프로 보내졌다. 1941년 6월 25일 아침 5, 6시경 전쟁이 터지고 사흘이 지나 민스크에까지 그 영향이 미치자 부모들은 서둘러 아이들을 데리러 캠프에 왔다. 이들은 민스크의 하늘이 독일군 전투기로 새카맣게 뒤덮여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소이탄 때문에 도시 전체가 불탔다. "도시 위 60m 상공으로 불길이 치솟아 올랐어요. 밤이 사라진 것 같았죠." 파벨이 이야기했다.

게토와 강제수용소 생활

파벨은 민스크로 달려갔지만, 부모님은 그곳에 없었다. "7월 19일 유대인들을 별도의 구역에 모여 살도록 한다는 명령이 떨어졌어요. 그 지역은 게토라 불렸지요. 아동보호소에서는 밥이라도 줬는데, 게토에 사는 사람들은 해골이 따로 없었어요. 나는 수레를 한 대 받았어요. 그리곤 두 달 동안 배고픔에 허덕이다 죽어간 뼈밖에 없는 시체들을 공동묘지로 실어 날랐지요."

"이후 게토에 살던 사람들은 강제수용소로 보내져 무기 제작소에서 일해야 했어요. 하루 14~16시간씩 작업했죠. 밥은 하루 한 번 청어 머리로 끓인 수프가 전부였어요. 그 기억 때문에 2년 전에서야 청어를 먹기 시작했어요. 그전엔 그 생선을 쳐다보지도 못했죠. 제가 살아난 건 순전히 파울이라는 독일인 덕분이에요. 제게 설거지거리로 냄비를 가져다 주었는데, 그 안에 음식물이 남아있곤 했거든요. 그 덕분에 산 거에요."

기적적인 탈출

"수용소 주위엔 철조망이 몇 겹씩 둘러져 있었고, 군인이 군견을 데리고 돌아다녔어요. 나는 수용소 동료와 밤중에 도망가기로 계획을 짰어요. 그런데 어느 날 저녁 갑자기 수감자들을 집합시키더라고요. 알고 보니 누군가 탈출 시도를 한 거였어요. 그 사람은 붙잡혀 다른 수감자들이 보는 앞에서 지독하게 구타를 당하고 교수형에 처해졌어요. 하지만 우리는 그래도 탈출하기로 마음먹었어요. 그렇게 될 운명이라면 내일 똑같이 이곳에서 교수형을 당하리라고 생각하고 말이죠.

우리는 개구멍으로 빠져나와 철도 쪽으로 갔어요. 갑자기 정말 우연하게도 화물차가 지나가더군요. 그 화물차에 매달려 그곳을 떠났어요. 친구가 땅에 끌리길래 끌어올려줬어요. 20km쯤 가서 달리던 기차에서 풀밭으로 뛰어 내려 엉망진창으로 굴렀어요. 사지가 멀쩡한지 더듬어 확인해 보았어요. 살아는 있구나 싶더라고요. 친구의 상태는 저보다 나빴어요.

우리는 숲 속을 헤매다 열흘 만에 빨치산 부대가 있는 곳에 다다르게 됐어요. 저와 친구는 복수심에 불타서 밤마다 잠도 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장에게 임무를 달라고 끊임없이 졸라댔어요. 대장은 우리에게 얼마나 이골이 났던지, 과거 다른 조들이 실패한 임무를 주곤 했어요. 하지만 보다시피 난 이렇게 살아있어요."

"나는 17살에 전쟁터에서 심한 부상과 타박상을 입었어요. 저를 묻으러 온 사람들이 기적적으로 제게 목숨이 붙어있다는 걸 알아채고 치료소로 보내 주었죠. 나는 부모님을 수소문하기 시작했고, 결국 찾아냈어요. 전쟁이 끝나자 아버지는 제게 공부를 시켰어요. 덩치 큰 청년이 아이들 사이에 앉아 있는 꼴이었죠. 전쟁통을 겪으면서 글을 잊어버렸어요. 놀림을 받기도 했지요. 독일어 선생님만 저를 흡족해 했어요. 강제수용소에서 독일인이 명령을 하는데 따르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래서 수감자들은 독일어를 달달 외우고 전부 기억해 냈어요. 안 그러면 죽으니까요."

장례단체의 대표

마르코비치는 현재 나치 강제수용소와 게토에 수감되었던 유대인 상이군인들을 위한 사회단쳬의 대표이자 상트페테르부르크 홀로코스트 기념관의 설립자이다. 그 자신이 2년 동안 나치의 박해를 받았다. 그래서 굶주림과 힘에 부치는 노역, 죽음에 대한 끝없는 공포를 겪은 사람들 모두를 하나로 모으기로 했다. 처음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550명, 북서지역에서 70명이 가입했다. 그러나 20년이 흐르면서 인원은 정확히 반으로 줄었다. "많은 회원들이 이미 집 밖으로 나오질 못해요. 그래서 우리는 도우미를 보내는 등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봉사자들 가운데는 독일인도 있지요"라고 마르코비치가 이야기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농담 삼아 스스로를 장례단체라 부를 만큼 자주 묘지에 가요. 이제 곧 제 차례도 오겠죠. 사람들에게 '떠날 때가 됐다'고 말하지만, 저와 헤어지려 하지를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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