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박씨' 후손 뿌리 찾아 고국 왔다

박양남(러시아 이름 그리고리 박)씨의 부인이 자식으로 추정되는 젊은이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박양남(러시아 이름 그리고리 박)씨의 부인이 자식으로 추정되는 젊은이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러시아 첫 이민 박양남 후손, 한국 조상 방문기

지난 10월 15일 오전 11시 인천국제공항에 모스크바발 비행기가 착륙했다. 승객 중에는 흥미로운 한 쌍의 부부가 있었다. 여자는 한국 사람 같은데 행동은 외국인을 닮았다. 옆에 있는 사람은 텁수룩한 콧수염 아래 약간 냉소를 짓는 듯한 백인 남성. 엘리나 박(52세)과 남편 드미트리 마르티노프다. 부부는 엘리나의 고국인 한국과 끊어진 인연을 되찾고, 성묘하고 친척들을 만나기 위해 온 것이다.

공항에는 엘리나 부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이번 여행에 함께하려고 세 시간 전에 카자흐스탄에서 온 엘리나의 고모 류드밀라 최(68세, 결혼 전에는 박씨)다. 러시아 박씨, 이들의 한국행은 길고도 험난했다.

지금으로부터 145년 전인 1869년 러시아 박씨의 선조인 박양남(그리고리 박)이 더 나은 삶을 찾아 러시아 제국으로 떠났다(2013년 5월 29일 러시아포커스 보도). 지금 그 자손들은 러시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의 여러 도시에 살고 있다. 역사적 조국인 한국에 대한 기억으로 남은 것은 러시아어로 번역된 족보뿐이다. 엘리나는 "나의 조부. 증조부는 족보를 가슴에 안고 다니셨어요. 온갖 전쟁과 혁명을 겪으면서도 간직하신 거죠"라고 말했다. 고려인 가운데 족보를 지켜낸 사람은 많지 않다. 엘리나는 지금의 남편, 아이들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살고 있다. 그녀를 27일 만났고 카자흐스탄으로 돌아간 류드밀라와도 통화했다. 그들이 풀어준 얘기는 길었다.

족보는 얼마 전까지 카자흐스탄에 살았던 종손 막심 박이 보관했다. 류드밀라는 "엘리나를 보러 모스크바에 간 적이 있었는데, 조카사위 마르티노프가 자기의 어머니쪽인 외가의 계보를 보여주더라고요. 서문에는 '아내 엘리나가 들려준 족보에 관한 이야기가 우리 가문의 계보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아내의 족보를 친척 어른 중 누군가가 가지고 있다는 말도 있었죠. 그건 바로 우리였어요. 제 사촌인 막심이 족보를 가지고 있었거든요. 막심이 죽자 족보는 방치됐죠. 그래서 제가 올해 박씨 중에서 가장 어른인 블라디미슬라프 박 삼촌의 칠순잔치에 오면서 족보를 가져왔어요"라고 말했다.

족보를 손에 넣은 엘리나와 남편은 과감히 작업에 착수했다. 박가의 본관을 조사하기 위한 팀 하나가 금세 꾸려졌다. 평생토록 러시아에서 산 사할린 출신 고려인으로 역사학자이자 계보학자인 이영빈이 큰 도움을 주었다. 3년 전 이영빈은 제2차 세계대전 고려인 피해자 귀향정책을 통해 아내와 함께 한국으로 이주한 사람이었다.

150년 만에 선산 찾아 성묘 ... 할아버지 닮은 친척 보니 울컥

영암을 찾은 루드빌라 최(결혼 전엔 박씨)와 엘리나 박. (사진제공=한국성씨총연합회 석민영 사무총장, 미하일 세르듀코프)
영암을 찾은 루드빌라 최(결혼 전엔 박씨)와 엘리나 박. 올해 러시아에선 '고려인 이주 150주년'을 기념하는 여러 행사가 열리고 있다.  이주 145년 만에 조상의 고향을 방문하는 귀한 선물을 받은 가족도 있다. 1869년 러시아 국경을 건넌 박양남씨의 후손이 그들이다. 2013년 5월 러시아 포커스 보도가 계기가 돼 박씨의 후손 5명이 지난 10월 중순 전남 영암에 있는 문중의 묘를 찾았다.(사진제공=한국성씨총연합회 석민영 사무총장, 미하일 세르듀코프)

한국과 한국어를 잘 아는 그는 한국성씨총연합회(황상득 총재)에 연락해 뜻 깊은 고향방문을 조직했다. 그들은 몰랐지만 흥미롭게도 Russia포커스가 2013년 5월 게재해 뜨거운 관심을 받았던 기사를 통해 한국성씨총연합회는 이미 박양남과 러시아 박씨에 대해 알고 있었다. 엘리나는 "이 기사가 북한으로도 보내졌다는 이야기를 누군가로부터 들었다"고 말한다. 한국 방문 추진 과정에서 연합회 석민영 사무총장의 도움도 받았다.

이렇게 해서 러시아 박씨들이 마침내 한국 땅을 밟게 됐다. 엘리나의 삼촌 스타니슬라프와 사촌 발렌틴도 그녀와 함께 모스크바에서 한국으로 왔다. 사촌 발렌틴과 똑같은 이름인 엘리나의 친오빠가 서울에서 이들을 맞이했다. 이렇게 다섯 명의 가족이 과거와의 만남을 위해 떠났다.

"모두 설렜죠." 류드밀라가 여행의 첫날 소감을 이야기했다. "장시간 비행한 뒤 바로 숙소에 짐을 풀고 여기저기 견학이나 모임에 다니느라 24시간 넘게 한숨도 못 잤죠. 하지만 마음이 들뜬 상태라 괜찮았어요. 전 벌써 노인인데도 말이죠." 그녀는 한숨을 쉬며 "제 일정은 적당해야 하지만, 그런 것도 전부 잊어버렸어요"라고 말했다.

(사진제공=한국성씨총연합회 석민영 사무총장, 미하일 세르듀코프)
영암 박씨 선조 묘 찾아 제사 (사진제공=한국성씨총연합회 석민영 사무총장, 미하일 세르듀코프)

16일 새벽 다섯 시, 박씨 가족은 모두 영암 박씨 선조의 묘가 있는 전라남도 영암군 구림마을로 향했다. 엘리나는 "묘는 풀잎 하나하나까지 관리가 아주 잘 돼 있었어요. 주변엔 온갖 꽃이 피어 있었죠. 아주 좋은 땅이었어요. 홍시와 무화과도 먹어 봤어요. 여기저기 가 본 곳이 많지만 그 무화과만큼 맛있는 건 먹어본 적이 없어요. 모든 게 너무 감동적이었죠"라고 말했다.

고려인의 제사는 현대 한국에서 지내는 제사와는 조금 달랐다. 엘리나는 "우리는 세 번 절하고 묘 주위를 세 바퀴 돌아요. 그리고 무릎을 꿇고 땅에 입술을 대죠. 한국에선 모든 의식을 세 번이 아니라 두 번씩 하네요. 몰랐어요"라고 말한다. 제사상에 과일을 차리는 것도 특이했다. 고려인은 닭고기나 다른 고기를 제사상에 올리기 때문이다. 저마다 생각에 잠겨 마음속으로 조상과 이야기를 나눴다. 상황이 어찌 됐건 고국을 두고 다른 나라에서 사는 데 대해 용서를 구하는 듯했다. 이들은 묘를 어루만지고 함께 오지 못한 이들에게 가져다 줄 흙을 챙겼다.

박씨 문중 한 선조의 비석, 박양남씨의 후손인 엘리나의 자식들. 엘리나의 남편은 러시아인이다. (사진제공=한국성씨총연합회 석민영 사무총장, 미하일 세르듀코프)
박씨 문중 한 선조의 비석, 박양남씨의 후손인 엘리나의 자식들. 엘리나의 남편은 러시아인이다. (사진제공=한국성씨총연합회 석민영 사무총장, 미하일 세르듀코프)

류드밀라에게 이번 여행은 쉽지 않았다. "얼마 전엔 너무 지쳐서 조상 옆에 묻어 달라고 해야지 생각했어요. 하지만 버텨냈죠. 사실 눈물을 못 참고 펑펑 운 적도 있었어요. 제 어머니께서는 한국에 가 성묘하길 간절히 바라셨는데, 일찍 세상을 뜨셨어요. 어머니께서 결국 못 가보셨다는 게 너무 안타깝고 속상해요. 이런 이유 때문에 과거와 마주하니 소름이 돋고 가슴이 떨렸어요."

엘리나에게도 조상과의 만남은 깊은 기억으로 남았다. "햇살이 우리를 비추고 있었어요"라고 말을 시작하더니 잠시 말이 없었다. 여행의 추억에 잠기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 방황만 하다 마침내 내 땅에 왔다는 느낌이 문득 들었어요. 전율할 만큼 강렬한 힘을 느꼈죠. 다른 사람들은 다음 일정을 위해 차를 타러 가고, 저와 남편은 좀 더 걸었어요. 조용한 숲 속에서 말이죠. 그곳이 천국처럼 느껴질 만큼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곳에 살지 않는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어요."

루드밀라 가족이 한국성씨총연합회 관계자와 함께 찍은 사진. (사진제공=한국성씨총연합회 석민영 사무총장, 미하일 세르듀코프)
루드밀라 가족이 한국성씨총연합회 관계자와 함께 찍은 사진. (사진제공=한국성씨총연합회 석민영 사무총장, 미하일 세르듀코프)

러시아 박씨 가족에게 두 번째 시련은 바로 한국에 사는 친척들과의 만남이었다. 엘리나는 모임에 갈 때 별다른 기대가 없었다고 고백했다. "모임이 성사되지 않을 수도 있었거든요. 실망할까 봐 큰 기대는 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엘리나의 할아버지 뻘인 박황주와 아저씨 뻘인 박경한씨, 박종소씨가 이들을 만나러 왔다. 그러나 정확한 촌수는 밝혀낼 수 없었다.

"친척 어르신들로부터 할아버지와 비슷한 모습을 확실히 알아봤어요. 전체적인 외모나 표정, 고개를 돌리시는 모습이 그랬죠." 당시 만남을 회상하던 엘리나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가슴속에서 뭔가 울컥했어요. 선 채로 영화에서처럼 손과 머리를 누가 누구를 쓰다듬었죠. 저는 너무나 감동했어요. 고모도 물론 그랬죠. 어떤 일에도 감동하지 않을 줄 알았던, 시장에서 나물을 파는 오빠와 삼촌까지도 울컥했어요. 지금까지 애쓴 게 모두 헛수고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행은 짧은 3일. 하지만 150년간 떨어져 있던 고향을 다섯 명의 박씨 가족에게 돌려주기에는 충분한 시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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