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10대들의 왕따 실태

러시아에서 9월 1일은 아이들이 입학하는 날이다. 첫날 사이좋게 지내라는 ‘미르(평화) 수업’을 듣지만 학급은 곧 ‘서열 정하기’ 정글로 변한다. (사진제공=이타르타스)

러시아에서 9월 1일은 아이들이 입학하는 날이다. 첫날 사이좋게 지내라는 ‘미르(평화) 수업’을 듣지만 학급은 곧 ‘서열 정하기’ 정글로 변한다. (사진제공=이타르타스)

9월 1일은 신학기의 시작이다. 코흘리개 1학년생의 첫 수업은 '미르(평화) 수업'이다. '친구와 착하게 잘 지내라'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그 말은 곧 잊히고 희생양이 나온다. 왕따다. 요즘 왕따 현상은 초등학교에서 정도가 심해지고, 가해 학생은 점점 '창의적'이며 '교묘해지고' 있다.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고민거리다. 러시아 초등생들의 왕따 실태를 알아봤다.

해마다 9월 1일이 되면 학교 운동장은 하양·빨강·노랑·주황 등 색색의 꽃으로 가득 찬다. 전교생이 꽃다발을 들고 빽빽한 반원을 그리며 섰다. 한편엔 올해 졸업을 앞둔 11학년생이, 다른 한편에는 '철부지' 1학년생이 선다. 반원 안에서 교장과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새 학년이 시작되는 '지식의 날'을 축하하며 당부의 말을 한다. 장기자랑에 이어 '공부도 잘하고 힘도 센' 11학년 학생이 1학년 여학생을 목마 태우면 아이는 작은 종을 힘차게 울린다. 긴 학창 시절을 알리는 첫 신호다.

첫 수업에 들어온 선생님은 친구와 착하게 잘 지내라고 가르치는 '미르(평화·세상이란 뜻) 수업'을 한다. 그러나 가르침은 곧 잊히고 희생양이 나온다. 요즘 이런 왕따 현상은 초등학교에서 정도가 심해지고, 가해 학생은 점점 '창의적'이며 '교묘해지고' 있다. 러시아 10대들의 왕따 실태를 알아봤다.

#장면 1=금발 고수머리에 예쁘장한 여학생 두 명이 한 여학생의 머리카락을 당기더니 밀쳐서 쓰레기 더미로 넘어뜨린다. 그러곤 자기 신발에 입을 맞추게 한다. 지난해 유튜브 러시아 사이트에서 13세 여자아이들이 반 친구를 괴롭히는 동영상이다. 이 장면은 TV에도 나오면서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됐다. 학생의 부모는 동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온 뒤 사태를 알게 됐고 가해 학생은 경찰 조사를 받았다.

#장면 2=아스트라한의 55번 학교 2학년 발레라 셰벨레프(8·남)는 왜 짝꿍이 자리를 옮기고, 우등생 나댜 볼코바가 자기와 말도 하지 않으려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더니 반에서 가장 '잘 노는' 남학생이 "발레라 귀는 큰 귀"라고 놀렸다. 곧 반 전체가 그렇게 놀리기 시작했다. 발레라는 처음엔 놀리는 학생에게 나쁜 별명을 짓거나 못 놀리게 하는 식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학우들은 발레라의 가방을 숨기거나 공책을 창문 밖으로 던져버리고, 등에 몰래 색칠을 하는 식으로 괴롭혔다.

2011년 입학한 1학년 학생 (사진제공=이타르타스)
2011년 입학한 1학년 학생 (사진제공=이타르타스)

엄마 엘레나 셰벨레바는 학교 양호실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나서 사태를 알게 됐다. 복도에서 세 명의 동급생에게 맞아 양호실에 가게 된 것이다. 엘레나는 알아보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도움이 되기는커녕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녀는 "담임 선생님이 수업 중 아들에게 여러 번 '귀는 커도 지식이 그 귀로 안 들어간다'고 말했다는 거예요"라고 흥분했다. 발레라도 "학교 다니기 싫었어요. 선생님도 저를 자꾸만 칠판 앞으로 불러냈어요"라고 기자에게 말했다. 발레라의 반을 옆으로 옮겨 겨우 사태를 막았다.

아이들은 이상하게 잔혹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모스크바 1589번 중학교 교장 소피아 보고로디츠카야는 "아이가 따돌림을 받는 이유를 명확히 파악해야 한다"며 "왕따 현상을 선생이 조장하는지, 같은 반 학생들이 시작하는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전자의 경우는 아이들이 무의식적으로 자신감 없는 학생을 골라 괴롭힘으로써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경우이며, 후자는 아이들이 무의식적으로 자신감 없는 학생을 골라 그 아이와 비교해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라고 교장은 지적했다.

2011년 입학한 1학년 학생 (리아노보스티)
2011년 입학한 1학년 학생 (사진제공=리아노보스티)

그러다 보니 별 게 다 왕따의 이유가 된다. 가장 손쉬운 공격은 뚱뚱하거나 말을 더듬는 등 신체적 차이가 두드러진 아이들이다. 가정 형편이 어렵거나 너무 예민해서 쉽게 화를 내고, 잘 우는 아이도 '고위험군'에 속한다. 사회적 환경의 차이도 원인이 된다. 시골에서 이사와 사투리를 쓰는 경우다. 심리학자들은 학생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 대략 6개월이 걸린다고 한다. 그 기간이 지나면 '반 내 서열'과 왕따 대상이 정해지는데 서열 정하기는 2학년, 3학년까지도 계속되며 아이들은 끊임없이 서로 시험한다.

모든 학교에는 심리치료사가 있어 따돌림당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심리 검사를 하고, 재능을 발견해 개발시키며 상담을 통해 자신감을 키워준다. 그래도 왕따를 막을 수는 없다. 개업의인 심리학자 마르크 산도미르스키는 "어떤 집단이건 희생양을 골라낸다"며 "왕따는 어떤 집단에서든 필요한데, 집단 전체의 긴장을 완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집단 공격을 하는 아이들은 유대감을 갖는다. 그는 "학생들의 세계는 경쟁이 치열하고 위계적인 곳이며, 특히 경쟁은 긴장도를 높이고 감정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왕따는 서열 싸움의 희생자다. 따돌림 받는 학생은 자신의 위치를 받아들이고, 서열 경쟁에 관심이 없는데 이 점이 집요한 관심에서 벗어나기 힘든 이유라고 말했다. 산도미르스키는 "따돌림 받던 학생이 전학 가거나 변한다 하더라도 다른 학생들은 그 역할을 대신할 새로운 대상을 찾는다"고 설명했다.

대부분 부모는 뒤늦게 '자식의 왕따'를 알게 되는데 어떤 부모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라고 타이른다. 하지만 심리학자들은 "자녀를 도와 함께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러나 실제론 복잡한 문제다.

마리나 로고바는 "제 딸 안나(5학년·11살)가 아무것도 안 먹고 잠을 못 자고 늘 머리가 아프다고 했어요"라고 말했다. 병원에 가니 정신과에 문의해 보라고 할 뿐이었다. 그러다 딸의 왕따를 알게 됐다. 어느 날 안나가 원피스가 젖은 채 돌아왔기 때문이다. 안나는 울기만 했다. 마리나는 다음 날 학교를 직접 찾아갔는데 일이 커져 버렸다. 딸이 교실 바닥을 청소한 물을 뒤집어 썼다는 것과 그것을 한 여학생이 주동했다는 것을 알았다. 화가 나 그 여학생에게 들고 있던 생수를 부어버리는 바람에 소동이 벌어졌다. 마리나는 난폭 행위로 고소됐고 안나의 입장은 더 어려워졌다.

마리나는 "아이를 대신해 문제를 해결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어찌 됐건 아이가 스스로 저항해야만 해요"라며 "하지만 아무리 어려도 어린 아이들이 어떻게 그처럼 잔인하고 못됐는지를 보면 견디기가 너무 힘들어요"라고 한숨을 쉬었다.

교사는 학급 내 문제를 보통 다 알지만 모든 교사가 피해 학생을 돕고 분위기를 원만하게 바꾸려 노력하는 것은 아니다. 소피아 교장은 "교사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개입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나는 교사들이 그런 상황에 제때 대응하도록 교육해요.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는 모두 도움이 필요한 특별한 아이들이기 때문이죠. 그 아이들이 자기가 최고라 느낄 수 있는 틈새를 찾아 주면 아이들은 자신감을 느끼고 왕따에서 벗어나게 돼요. 이는 교사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에요"라고 말한다.

모스크바에 있는 '유레카' 교육정책문제연구소 지도교수이자 철학박사 알렉산드르 아담스키는 "왕따 실태가 정확히 집계되지 않았다"며 "하지만 왕따는 일반적이며 명문 학교에서는 안 좋은 별명을 붙이거나 정신적으로 모욕을 준다면, 일반 학교에서는 발로 차는 식의 행동이 벌어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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