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타 회담과 70년 후 유럽 내 영향권 쟁탈전

(사진제공=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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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대조국전쟁(2차 세계대전) 승리 70주년뿐만 아니라 얄타와 포츠담 회담 70주년도 맞이한다. 두 회담에서 승전국 수뇌들은 전후 세계 질서의 토대가 된 결정들을 채택했다. 종전 몇 개월 전 열린 얄타 회담은 반 히틀러 연합국 정상들의 협력에 있어 정점을 찍은 사건이었다. 하지만 곧이어 ‘얄타 정신’은 수십 년에 걸친 냉전과 유럽 분할의 현실에 빛을 잃었다.

역사학자들은 얄타 회담을 둘러싼 사건들을 언급하며 이렇게 묻고 있다. 세계 정상들이 얄타에서 과시한 화합은 그 뒤를 이은 냉전 체제의 관점에서 볼 때 그저 환상에 지나지 않은 것은 아닐까? 환상이 아니라면, 그들의 화합은 왜 그렇게 공고하지 못했을까?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타협에의 의지

역사학자들은 어쨌건 1945년 2월 초 승전국 정상들이 보여준 타협에의 노력을 '환상'으로 치부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얄타 회담의 주역인 소·미·영 3국 정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미하일 먀흐코프 러시아군사역사협회 학술책임자가 Russia포커스에 밝혔다. "그들(스탈린과 루즈벨트, 처칠)은 실제로 게임의 법칙에 관해, 전후 세계의 모습에 대해 합의를 보고 싶어 했다." 먀흐코프의 말이다. "얄타 회담의 최대 과제는 향후 독일의 유럽 지배를 방지하는 데 있었다. 다시 말해 나치즘의 등장을 방지하고 전쟁을 종식시켜 평화 시기가 아주 오래 지속하도록 하는 데 있었다. 얄타 회담은 이 목표를 거의 달성했다." 먀흐코프가 '빅 3'의 유엔(UN) 헌장 합의에 대해 상기시키며 이같이 밝혔다.

얄타에서 이미 드러난 이견들

이와 동시에 독일 역사학자 요스트 뒬퍼는 얄타에서 "일부 타협안 도출이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폴란드 정부의 구성과 소련 및 기타 국가들에 대한 독일의 배상금 규모를 둘러싸고 "이견이 고스란히 노출됐다"고 말했다.

뒬퍼는 독일 국제 라디오 방송 '도이체 벨레(DW, Deutsche Welle)와의 인터뷰에서 "연합국들을 통합시켜준 요인들은 이미 1946~47년에 이르러 사실상 바닥을 드러냈다"고 밝혔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얄타에서 여전히 기회가 있었지만,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이념 대결로 인해 양측 모두가 '자신의 형상에 따라 자신의 모양대로' 세력권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뒬퍼는 러시아와 서방 국가들 사이에 이견이 불거진 또 다른 근본 원인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소련이 나치 독일로부터 동유럽을 해방한 후 해방된 영토에서 자신의 이익 수호를 꾀해 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얄타 정신으로부터의 이탈과 냉전 시작에 대한 근본 책임을 스탈린에게 돌리는 연구자들도 있다. 군사학자 보리스 소콜로프의 지적에 따르면, 서방은 얄타에서 사실상 유럽의 영향권 분할로 나아갔지만 "소련이 동구권에 대해 그처럼 압도적인 지배력을 행사하게 될 줄"은 예상치 못했다. "소련의 영향권 안에 위치했지만, 독립을 유지하며 공산화되지 않은 핀란드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리라" 예상했다는 것이다.

미국 자본에 대한 관심

이와 동시에 동유럽의 소련화 정책이 냉전의 원인이 됐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 역사학자들도 많다. 이들은 스탈린이 '얄타 정신'을 고수하려 노력했으며 전쟁이 끝나자마자 동구권 국가들을 소련의 공산주의 위성국화하려고 강압을 행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스탈린은 소련 국경선을 따라 완충지대를 만들려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친공산주의 국가들이 아니라 폴란드, 루마니아, 헝가리 등 소련에 우호적인 동유럽 국가들로 구성된 '안전지대'를 구축하고자 했다고 먀흐코프는 말한다. "스탈린은 동구권의 공산화, 그리고 이들 정부 지도자들이 공산주의자들로 전면 교체되어야 한다고 선언한 적이 결코 없다. 소련 지도부 전체가 그렇게 될 경우 경제 분야 등에서 서방의 저항에 부딪힐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소련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국가 복구를 위해 미국의 전후 원조 연장에 관한 회담을 진행하고 있었다. 먀흐코프는 냉전 시작의 책임이 서방과 소련에 골고루 돌아가야 한다고 평가하며 이같이 밝혔다.

크렘린궁, '과거의 오류' 답습할까?

전후 시기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은 당시 소련의 정책과 현재 크렘린궁의 행동 사이에서 일정한 유사점을 도출할 수 있다고 말했다.

뒬퍼는 "현재 유럽 내 상황이 당시와 매우 흡사하다"고 평가했다. 푸틴은 그가 추진하고 있는 정책과 그의 행동에 담긴 성격으로 미뤄볼 때 '스탈린의 전통'을 계속하고 있다. 뒬퍼는 1989~90년 이후 예상치 못한 영향권 분할이 유럽에서 다시 시작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모든 정치학자가 크렘린의 정책이 현 위기의 유일한 원인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지정학적 측면에서 보면, 얄타에서 시작된 영향권 쟁탈전은 한 번도 종결된 적이 없다. 이 투쟁의 불꽃은 타오르기도 했고 꺼지기도 했다. 지금 우리는 이 투쟁극의 마지막 일막을 지켜보고 있다. 여기서 서방 세계는 자신들이 모든 카드를 쥐고 있고 러시아는 1990년대 이후 더 이상 부상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먀흐코프가 이같이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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