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존재 국가… 어떻게 북한은 소련이 한국을 잊도록 만들었나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소련을 대표하는 여자 체조팀.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소련을 대표하는 여자 체조팀.

발레리 주파로프와 이고리 웃킨/ 타스
소련 시대가 막 끝날 때까지도 한국은 보통 소련 시민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한국과 소련의 외교 관계는 소련이 붕괴 직전 1990년 9월에야 수립됐다. 이전에 소련은 평양에 있는 북한 정부를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했다.

나는 1980년대 초 레닌그라드국립대학교의 내 교수님께서 대학 도서관에 한국 책들을 주문하려고 했던 때를 기억한다. 그의 도서 구입 요청은 승인되지 않았다. 이념적 열성파였던 도서관 사서가 “우리는 비존재 국가에서 출판된 책들을 주문할 수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도서는 영국을 거쳐 입수됐다.

이러한 고의적 무지 정책은 어느 정도 북한의 정치적 압력이 낳은 결과였다. 북한은 심지어 소련과 한국의 가장 순수한 교류조차도 방해하려고 강하게 압박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소련이 북한을 의심스럽지만 쓸모 있는 동맹국으로 간주하고 따라서 정치적으로 조금 양보하지 않았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1968년 소련 정치국은 소련이 한국이 주최하는 모든 스포츠 행사와 학술대회, 국제회의를 보이콧한다는 결정을 했다.

대개 소련 당국은 한국 시민들에게 비자를 발급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중요한 다국간 행사들에 참가하러 올 때는 일부 예외가 있었다(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예외들이 점점 빈번해 졌다).

한국은 ‘가난하고 억압적인 나라’

1970년대까지 소련 일반 대중은 한국에 큰 관심이 없었고 솔직히 말하면 한국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을 포함한 소련 시민 대다수에게 한국은 매우 억압적이고 아주 가난하다고 생각된 또 하나의 친미 군사독재 국가였을 뿐이었다.

흥미롭게도 필자는 1980년대 초 대학에서 비로소 한국의 경제적 성공에 관해 알게 됐는데, 이러한 지식은 반쯤은 기밀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돼 일반인들 사이에서 아주 폭넓게 논의되지 않았다.

물론, 소련 엘리트들을 이념가들의 음모집단으로 봐서는 안 된다. 의사 결정자들은 한국이 급속하게 발전하고 있는 반면 북한은 경제적, 정치적 부담거리가 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1970년대 초부터는 한국이 주로 잠재적 무역 상대국으로서 매력이 증가함에 따라 결국 인정돼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

나는 1983년 미하일 카피차 소련 외무차관이 아시아학을 전공하는 소련 주요 대학 학생들을 상대로 한 강연회에 참석한 때를 기억한다. 카피차 외무차관은 소련 외교관으로서는 굉장히 솔직한 사람이었는데, 특히 비공개 석상에서 얘기할 때는 한국에 대한 공식 인정이 시간 문제일 뿐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시인했다.

예상대로 상황은 페레스트로이카 시대에 급진전했다. 소련은 약간의 고려 끝에 1988년 서울 올림픽 참가를 결정했다. 이 무렵 소련 매체들은 한국의 경제 기적을 솔직하게 논의하기 시작했고 현실과 동떨어진 북한의 개인숭배와 지나친 프로파간다를 조롱하기도 했다.

1980년대 말은 급격한 변화의 시대였다. 부유하고 힘 있는 한국 사람들이 모스크바로 떼지어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침내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노태우 대통령과 만났고 곧이어 외교 관계가 수립됐다. 고르바초프는 제주도도 방문하여 한국 땅에 발을 들여놓은 최초의 러시아 수장이 되었다(북한을 방문한 소련 국가 수장은 아무도 없었다).

>> 러시아, 일본의 한국 강제 병합 지지했나?

This website uses cookies. Click here to find out more.

Accept cook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