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정교회가 한국에서 성공할 기회가 없었던 이유

1919년, 레닌이 페트로그라드 광장에서 연설하는 모습.

1919년, 레닌이 페트로그라드 광장에서 연설하는 모습.

ZUMA Press/Global Look Press
서울을 돌아 보면 (적어도 한국에는) 다소 이례적인 모습을 한 건물을 우연히 볼 수도 있다. 한국 최대의 정교회 교회인 성 니콜라스 교회가 바로 그것이다. 이곳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뿌리 내린 러시아 정교회의 유구하고 때때로 굴곡졌던 역사를 기억나게 한다.

1897년 러시아 정교회는 서울에 선교단을 열기로 했다. 당시는 한국 내 러시아의 영향력이 최고조에 달했던 때여서 러시아 정책 입안자들은 정교 신앙의 확산을 한국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도모하는 수단, 오늘날 말하자면, 러시아의 ‘소프트 파워’를 증진하는 수단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선교단이 가동될 무렵에 정치 상황이 결정적으로 바뀌면서 한국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은 일본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하지만 당시 한국에는 러시아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 선교단(또는 적어도 교회)이 여전히 필요했다.

선교단이 정교 신앙 전도에서 성공하리라는 희망이 있었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러시아 정교회는 특히 동아시아 선교 활동에서 특별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9세기 후반에 러시아 선교사들이 상당히 많은 신자를 끌어 모았던 일본만이 주목할 만한 예외였다. 하지만 1900년대 초 정교회 선교사들은 러시아 내 한국인 정착민들 사이에서 거둔 성공에 고무됐다.

일시적 성공

한국인들은 1860년에 러시아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그들 중 많은 사람이 곧이어 정교회로 개종했다.

이는 개종하면 러시아 당국의 의심을 덜 사게 되고 새로 정착한 나라에도 충성하는 것으로 보이리라는 가정에서 종종 비롯됐다. 어쨌든, 이들의 개종은 성공하여 선교사들을 고무시켜주었다.

크리산토스 솃콥스키 대수도사제가 1900년 1월 선교단장으로 서울에 도착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많은 프로젝트를 새로 시작했다. 1900년에서 1903년까지 선교단에는 교회 학교들과 함께 건물 6개가 새로 추가됐다. 성 니콜라스 교회는 1903년부터 가동됐다.

하지만 선교단 활동은 노일전쟁으로 중단됐다. 선교단 건물들은 프랑스 외교관들이 보호해 줬으나 선교단 직원들은 중국으로 추방됐다.

노일전쟁이 끝난 뒤엔 전도 기회가 거의 없어 서울 거주 러시아인 숫자도 20~30여 명(주로 영사관과 사업가들)으로 급감했다. 하지만 선교단은 모스크바 본부 교회의 보조금 지원 속에 계속 가동됐다.

1917년 혁명 이후

1917년까지 선교단에는 러시아인 직원 12명이 있었고 한국인 교회 교사도 17명 고용돼 있었다. 한국인 정교회 신자들은 전국에 걸쳐 수백 명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러시아에서 귀국한 한국인 이주자였다. 하지만 대다수는 새로 개종한 사람들이었다. 1912년에는 한국인 사제가 처음으로 서품을 받았다.

예상대로 1917년 10월 혁명은 선교단에 큰 타격을 입혔다. 새로 들어선 공산주의 정부는 러시아 국내외에서 철저하게 무신론 노선을 채택했기 때문에 ‘반동적’이고 ‘봉건적’인 선교단 활동을 지원해 줄 이유가 없었다.

큰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한 선교단은 몸집을 줄여야만 했다. 그래서 1918년 말쯤에는 사제 한 명과 한국인 직원 두 명만 남게 됐다. 선교사들은 선교단 소유의 밭을 일궈 살아야 했다.

서울 거주 영국인 주교를 포함한 일부 호의적인 외부인들이 그들에게 약간의 재정 지원을 제공해줬다. 그 게 선교단이 외부인들에게 임대할 수 있는 다소 널찍한 건물들을 소유하는 데 도움이 됐다.

러시아 혁명 직후 일어난 내전에서 적군이 승리하고 나자 선교단의 앞날은 캄캄해 보였다. 그리고 1922년 선교단 관할권은 모스크바에서 도쿄에 있던 당시 일본 정교회 수장에게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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