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러시아 극동은 피비린내나는 내전의 늪으로 빠져 들었다. 적군과 백군 양 편 모두 잔혹한 전투를 치르고 있었으며 상대편 처형은 평범한 일상의 일부처럼 여겨졌다. 그런 처형 중 하나가 1918년 9월 16일 이른 새벽 아무르 강 연안의 최대 도시인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있었고 그날 한 무리의 공산당원들이 백군 병사들의 총에 처형됐다.

총살된 이들 중에는 폴란드식 성을 가진 알렉산드라 스탄케비치라는 여인이 있었다. 하지만 이름만 보고 그녀를 판단하면 안된다. 그녀는 김애림이란 이름의 한국계 여성으로 한국 최초의 공산주의자로 세계에 알려진 인물이었다.

지금까지 그녀의 삶에 대한 믿을 만한 자료는 매우 희귀했다. 최근 들어 러시아와 한국 학자들(보리스 박, 벨라 박, 김철훈)의 노력으로 이 위대한 여인의 일생을 좀 더 깊이 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됐다.

공산주의자가 되기까지

알렉산드라의 부친은 1869년 경에 러시아에 정착한 표트르 김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러시아어와 중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며 정교회에 귀의한 고려인이었다. 알렉산드라가 태어난 1885년 그는 항간에 실력있는 통역가와 번역가로 알려져 있었다.

1896년 표트르 김은 당시 러시아 제국의 거대 토건 사업인 동청철도(東淸鐵) 부설 현장에서 통역사로 일을 시작했다. 덕분에 알렉산드라는 러시아 정규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이는 당시 고려인 가정의 여자 아이에게는 드문 기회였다. 건설 현장에서 표트르 김은 폴란드계 러시아 철도 기술자인 이오시프 스탄케비치와 친구가 됐다.

1902년 표트르 김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친구인 스탄케비치 가족은 알렉산드라를 떠맡았고 그녀가 블라디보스토크의 사범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그녀는 당시 러시아 대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던 사회주의 좌파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졸업 후 그녀는 교사생활을 시작했고 그 무렵 알렉산드라는 이오시프 스탄케비치의 아들과 결혼했다(두 사람은 1910년 경 이혼했다).

1915년 알렉산드라는 수많은 중국인, 고려인 노동자들이 벌목공으로 일하고 있던 우랄산맥 일대에서 중국어와 한국어 통역사로 일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1917년 초 그녀는 볼셰비키당에 가입했다.

이상적인 후보자

볼셰비키당 조직지도부에게 그녀는 신이 보내준 선물처럼 보였을 것이다. 동아시아의 두 주요 언어에 능통하며 고등교육을 받은 젊고 헌신적인 여성, 동양여성의 외모를 가졌지만 흠결없는 고상한 러시아어를 구사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라 김은 극동의 한국인 사회에 공산당 세포를 조직하는 임무를 받고 바로 극동으로 파견됐다.

1917년 10월 혁명으로 공산당이 권력을 잡자 그녀는 하바롭스크 소비에트의 외무위원으로 임명됐다. 중앙집권적인 제국이 무너진 상황에서 그녀가 맡은 직책은 그저 상징적인 것은 아니었다. 중대한 지역의 외교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당시 그녀가 외무위원으로서 내린 결정들에 대해 지나치게 엄격한 평가를 내려서는 안 된다고 본다. 예로, 알렉산드라 김은 ‘반혁명 장교들’에게 사형 선고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을 갖고 그녀를 비난하기는 쉽지만, 당시는 잔혹한 일상이 수없이 반복되던 내전 시기였다. 게다가 그녀를 체포한 백군들 또한 그녀의 운명을 결정하는 순간에 결코 자비와 친절을 베풀지 않았다.

1918년 8월 하바롭스크는 백군에 의해 포위됐고 공산당 지도부는 탈출을 서둘렀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아무르 강을 운항하는 기선에 몸을 숨겼다. 하지만 기선은 곧 백군의 의해 나포됐고 알렉산드라 김을 포함해 배에 타고 있던 공산당 간부 전원이 체포되어 종국에는 처형됐다. 한국 공산주의와 페미니즘의 선구자가 될 뻔한 한 여성의 생애가 그렇게 마감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