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다시 페레스트로이카를 생각한다

(일러스트=그리고리 아보얀)

(일러스트=그리고리 아보얀)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소련에서는 자신과 나머지 세계의 모습을 바꾼 변화가 시작됐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소련에서는 자신과 나머지 세계의 모습을 바꾼 변화가 시작됐다.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페레스트로이카는 아주 짧은 기간, 불과 7년도 채우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 시절 무엇이, 왜 일어났는 지를 규명하고, 페레스트로이카를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꼭 필요한 중요한 일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페레스트로이카는 무엇보다 20세기 마지막 몇 십 년 동안 소연방이 직면했던 역사적 도전에 대한 응전이었다. 1980년대 중반 소련은 매우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소련의 중앙집권형 수직행정시스템은 사람들의 창의성을 위축시키고 경제의 숨통을 옭아맸으며, 그에도 불구하고 창의성을 발휘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처벌을, 그것도 엄벌을 내렸다.

그 결과 1980년대 초 소련은 산업 노동생산성에서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2.5배, 농업에서는 4배나 뒤지고 있었다. 군국화된 경제로는 점점 더 군비경쟁의 굴레를 끌고 나가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나는 단언할 수 있다. 우리가 개혁을 시작한 것은 명예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더 나은 삶과 더 많은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우리는 페레스트로이카를 서로 얽혀 있으며 서로 의존하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전 지구적인 과정의 일부라고 인식했다.

페레스트로이카(개혁)의 가장 중요한 수단은 글라스노스티(개방) 정책이었다. 글라스노스티란 당연 언론의 자유를 의미한다. 사람들이 검열과 탄압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의 불만을 공개적으로 말하고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피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글라스노스티는 동시에 국가 활동의 개방성, 즉 사람들이 국가 지도부에 정부의 결정을 설명하고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하도록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했다.

글라스노스티는 사회를 뿌리부터 흔들었으며, 소련 지도부에 그때까지 보지 못했던 많은 것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 우리는 사람들이 더 빠른 개혁을 원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급기야 1988년 당대회에서는 고위급 권력기관장들에 대한 대체 선거를 실시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는 민주주의로 가는 매우 중요한 한 걸음이었다.

초기에는 너나할 것 없이 모두가 개혁을 지지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단호하지만, 점진적인 개혁을 반대하는 이들이 국가 지도부는 물론이고, 이른바 사회 엘리트층에도 있다는 사실이 차츰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 쪽에서는 분리주의자들과 결합한 극단주의자들이 대중, 특히 지식층의 불만을 등에 업고 "모든 것을 뿌리부터 뒤집어엎자"고 요구했고 사람들에게 일이 년 후에는 지상낙원이 도래할 것이라는 무책임하고 실현불가능한 약속을 남발해댔다.

그런가 하면 다른 쪽에는 과거에 안주한 채 실질적인 개혁을 두려워한 나머지 사람들의 자유로운 선택을 신뢰하지 못하고 그와 동시에 기존의 특권을 잃을 수 없었던 보수주의자들이 있었다. 공개적인 정치 투쟁에서 패배한 후 1991년 8월 불발 쿠데타를 일으켜 당시 소련 대통령이었던 나의 입지를 뒤흔들고 극단주의 세력에 길을 활짝 터준 것이 바로 그들이다. 극단주의 세력은 몇 개월 후 소연방을 해체했다.

나는 정치적인 방법으로 소련이라는 연방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나는 정치적 해법을 원했다. 나라를 내전의 문턱으로 내몰 무력의 사용을 나는 용인할 수 없었다.

8월 쿠데타 진압에서 긍정적 역할을 담당한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위선적인 입장을 택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3국 지도자가 비밀리에 모여 소련의 해체를 결정한 '벨로베시 협정'을 맺은 것이다.

나는 소련 경제의 대대적 탈중앙화, 구성공화국들에 최대한 광범위한 전권 이양에 동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 최고회의는 완전히 다른 결정을 박수로 통과시켰다. 그 결과 기존의 (소연방을 지탱해온) 모든 관계들이 무너지고 심지어 단일 국방 시스템 같은 극히 중요한 시스템마저도 와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어떤 이들은 무지에서 다른 이들은 악의적인 이유에서 주장하듯이 페레스트로이카 때문에 소련이 붕괴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소련의 붕괴, 그리고 특히 1990년대에 많은 이들이 겪었던 궁핍과 시련은 페레스트로이카의 단절에 따른 결과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페레스트로이카는 과거로의 회귀를 불가능하게 만든 근본적인 변화를 우리의 삶에 가져왔다.

무엇보다 정치적 자유와 인권이 그것이다. 선거를 할 수 있는 권리, 지도자를 내손으로 뽑을 수 있는 권리처럼 오늘날 당연하게 여겨지는 권리와 자유가 그것이다. 자신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는 자유, 자신의 신앙, 종교를 포교할 자유, 자유롭게 해외로 나갈 수 있는 자유, 자신의 사업을 시작하고 부자가 될 수 있는 자유가 그것이다.

우리는 군비경쟁을 중단하고, 핵무기 감축 과정을 시작했다. 서방, 중국과의 관계도 정상화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군대를 철수했고, 많은 국지적 분쟁을 해결했다. 국가경제의 세계경제로의 통합 과정이 시작됐다.

이것은 실질적인 성과다. 많은 이들이 오늘날 묻는다. 그렇다면 왜 현재 세계는 이토록 불안한 것인가? 어쩌면 페레스트로이카와 그때 우리가 세계에 제안했던 '신사고' 때문은 아닐까?

그렇지 않다. 그런 의견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위험들은 페레스트로이카의 단절, 소련의 붕괴, 신사고 원칙으로부터의 후퇴, 상호의존적인 글로벌 세계의 현실에 부응하는 안보와 협력 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하는 신세대 정치지도자들의 무능의 결과로 대두된 것이다.

냉전 종식으로 탄생한 알토란 같은 기회들을 우리는 모두 흘려보냈다. 얼마나 많은 가능성들이 헛되이 사라졌는가.

국내적 원인으로 소련이 붕괴하자 서방에서는 많은 이들이 박수로 환호했다. 양 진영과 전 세계의 승리라고 할 수 있을 냉전의 종식을 두고 그들은 서방과 미국의 승리라고 공표했다.

그 결과 세계는 더 안전한 곳이 되지 못했다. '세계 질서' 대신에 우리는 '전 지구적 혼란'을 얻었다. 제3세계 국가들 뿐만 아니라 유럽도 분쟁에 휩싸였다. 그 결과 오늘날 바로 우리 코앞에서 군사적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

우크라이나 분쟁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다. 이 분쟁의 뿌리 깊은 원인은 페레스트로이카의 단절, 벨로베시 숲에서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지도자들이 내린 무책임한 결정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이후의 우크라이나는 끊임없이 분열의 시련을 겪어 왔다. 서방은 우크라이나를 유럽대서양 공동체로 불러들이면서 보란듯이 러시아의 이익을 무시했다.

물론 페레스트로이카와 신사고에 입각한 과거 대외정책의 경험을 가지고 현재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준비된 처방전을 내놓을 수는 없다. 세계는 변했다. 세계 정치의 전면에 새로운 '행동주체'들이 나타났고 새로운 위험요소들이 대두됐다. 하지만 인류가 직면한 어떠한 문제도 한 나라 또는 일군의 나라들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어떠한 문제로 군사적으로 해결돼서는 안 될 것이다.

러시아가 현재의 '전 지구적 혼란'을 극복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서방도 이해해야 한다.

러시아도 정치적 측면에서 과거 페레스트로이카 시절 대두된 많은 과제들이 여전히 미제로 남아 있다. 다원적이며 경쟁력을 갖춘 정치체제, 진정한 다당제의 구축, 균형 잡힌 권력구조를 위한 견제와 균형 시스템 구축, 주기적인 권력 교체가 그것이다.

나는 러시아와 세계 정계가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오로지 민주주의에 입각해야 한다고 확신한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민주화된 러시아 정치, 민주화된 국제관계다. 다른 길은 없다.

* 본 기고문의 영어 전문은 rbth.com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 본 기고문은 러시아어로 로시스카야 가제타에 처음 게재되었습니다. (아래링크 참조: rg.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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