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의 러시아’...초강대국 이데올로기 어떻게 구현되고 있나

(일러스트=니야즈 카리모프)

(일러스트=니야즈 카리모프)

러시아 헌법은 국가이데올로기(государственная идеология)를 금지한다. 대신 이데올로기와 동의어인 '국가이념(национальная идея)'이란 말로 이를 피해갈 수 있다. 국가이념을 수립하자는 푸틴의 호소는 포스트소비에트 시대의 러시아에 새로운 것은 아니다. 1996년 이미 옐친이 같은 과제를 내놓았었다. 새로운 점이 있다면 러시아에 필요한 이데올로기의 성격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발다이 클럽' 회의 연설에서 정부가 이념의 전환을 준비한다는 사실을 시사하였다.

"위대한 유럽국가 - 러시아"라는 공식은 사실상 과거 러시아 연방이 내세우던 국가 이데올로기다. 이는 러시아 역사에서 '서구주의자'라 불리는 정치사조와 일맥상통한다. 고르바초프, 옐친, 메드베데프, 그리고 누구보다 푸틴이 바로 서구주의자다. 소련 말기 정치엘리트층 사이에서는 비공개적으로 '통합사상(идея конвергенции)'이 논의되었고, 인기를 모았다. 그들은 국가의 미래가 첨단기술을 갖춘 서방와의 통합에 달려있다고 생각했으며 새로운 지정학적 구조로 '부유한 북반구'의 통합을 꿈궜다. 하지만 옐친 정부 말기 미국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미국의 유고슬라비아 공습) 이러한 전략적 계획에 수정이 가해졌다. 러시아 정치지도부는 서구 통합 대신 유럽 통합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통합된 유럽세계에서 러시아의 역할을 단순한 구성원이 아닌 잠재적인 지도자로 구상했다.

이렇게 채택된 이데올로기에 따라 러시아가 서구식 개혁에서 어떠한 성과를 냈는지 과시하는 것이 국정의 목표가 되었다. 이에 따라 자유주의적 수사법이 적극 활용되기 시작했다. 러시아가 서구와 동질의 가치관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서방세계에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같은 목적으로 여러 정책이 시행됐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볼로냐 프로세스에 맞춘 러시아 학제 개편과 청소년 권리 관련 제도의 도입이다.

그러나 2012년 대선이 치러질 무렵 "위대한 유럽국가 - 러시아"라는 이념적 프로젝트가 실패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 실패는 여러 정황에 근거한 것이었다. 첫째, 유럽, 더 나아가 서구 세계는 러시아와의 문명적 동질성을 사실상 거부함으로써 러시아를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둘째, 서방을 모델로 한 러시아의 개혁은 기존의 삶의 방식을 붕괴시켰으나 새로운 방식을 창조해내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났다. 셋째, 국민 대부분은 친서방적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서방이 러시아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는 러시아가 버리지 못한 제국주의적 야망과 초강대국으로 부활할 수 있는 잠재력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푸틴의 신(新)제국주의 정책').

러시아 정치엘리트층이 채택한 '위대한 유럽 국가'라는 정치개념 안에서도 내부분열이 일어나고 있다. 분열은 '초강대국 러시아' 대 '유럽국가 러시아' 중 하나를 선택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이 불가피한 선택은 정치엘리트층을 분열시켰다. 푸틴은 초강대국을 선택했고, 발다이 클럽 연설의 내용이 이를 확실히 증명한다.

푸틴의 선택이 아주 얼토당토한 것은 아니다. 과거 세계사에는 위대한 미합중국, 위대한 영국(Great Britain, 즉 대(大)영 제국이라는 국명으로 고착되기도 한), 위대한 중국('중심에 있는 나라')같은 야심찬 계획들이 이미 있었으니 말이다! 위대한 러시아라는 계획이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다.

'초강대국'이라는 이념을 채택하자, 그에 합당한 위상을 과시해야 했다. 푸틴 집권기에 시행된 많은 정책들이 '강대국'의 위상을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다. 강대국의 논리에 따라 국정 전반에 걸쳐 이러한 정책이 시행됐다. 그러한 과시용 정책의 예를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 위대한 기술 강국 - 고속철도 사업, 글로벌 위성항법시스템 사업, 2020 예카테린부르크 엑스포 유치 사업)
  • 위대한 군대 - 2013년 소련 시절을 망라해 최대 규모의 군사훈련 실시
  • 위대한 건설 - 블라디보스토크와 루스키 섬을 연결하는 세계 최대의 사장교 건설
  • 위대한 과학 사업 - 러시아의 실리콘밸리를 꿈꾸는 스콜코보 혁신센터 설립
  • 위대한 건축물 - 푸틴 집권기에 러시아에서 가장 큰 건물 8개가 지어졌다. 그중 '머큐리 시티 타워(338.8m)'가 현재 최고층 건물이며, 앞으로 그것을 뛰어넘는 '연방타워(Башня Федерация, 385m)'와 '라흐타 센터(463.7m)'가 지어질 예정이다.
  • 위대한 러시아 종교 - 소련 붕괴 후 러시아의 여러 전통종교의 최대 사원들이 세워졌다.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러시아정교회, 103m), 니즈네캄스크 사원, 그로즈니 '체첸의 심장', 카잔 '쿨 샤리프'를 포함하는 유럽 최대 회교사원 6곳(이슬람), 유럽 최대 사찰 '석가모니 부처 황금사원'(불교)이 그것이다.
  • 위대한 문화 - 옐친 기념 도서관 설립, 여러 역사적 기념일에 대한 대규모 축하행사 개최
  • 위대한 스포츠 강국 - 카잔 하계 유니버시아드 단일 국가 획득 메달 수에서 절대적 기록 수립,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 개최, 2018년 월드컵 개최
  • 위대한 지정학적 위상 - 유라시아경제협력체(EurAsEC) 관세동맹 결성을 통한 포스트소비에트 공간 재통합

상당한 비용이 들어가는 이 사업들의 당위성과 관련하여 푸틴은 이미 지난 2004년에 자신이 생각하는 '국가이념'에 대한 연설에서 "전방위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초강대국 러시아를 과시하는 프로젝트들이 마치 상품 브랜드처럼 진열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사업 대부분이 국내 사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시행되고 있다. 국가의 성장 동력이 되기는커녕 나라살림을 축내면서 발전 불균형을 심화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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