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이라는 과거’의 재조명

(일러스트=세르게이 욜킨)

(일러스트=세르게이 욜킨)

소련 시절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왜 그 시절이 좋았다고 하는 것일까?

모스크바국제대학교(МУМ) 언론학부 학생들에게 소련의 장점을 써내라는 과제를 주었다. 내가 궁금했던 것은 대학생들이 소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아니라, 그들에게 그 시절에 대해 이야기해 준 이들의 기억 속에 새겨져 있는 소련의 모습이었다.

내 손엔 일곱 명의 학생이 제출한 과제지가 들려있다. "구속, 평등, 추악"(프랑스 혁명이 내세운 세 가지 가치 '자유, 평등, 박애'의 패러디) 아니면 "소련의 상상 극장"(영화제목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의 패러디)... 학생들의 대답은 상당히 풍자적이었다.

자, 그럼 스무 살 내기 학생들이 과거 소련 시절에서 되돌리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인지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 5명

안정된 미래와 미래에 대한 확신 – 5명

유대감, 우애, 선의 – 4명

안전, 낮은 범죄율 – 4명

훌륭한 교육, 지적인 삶 – 3명

사회보장 – 3명

자아실현의 기회, TV 방송 등 수준 높은 예술 – 3명

수준 높은 스포츠, 강한 군대, 양질의 보건제도, 전국민 주택 보급 - 각각 2명

과학기술 저력, 조국애, 정말 맛있던 껌 - 각각 1명

정말 '상상극장'이 아닐 수 없다.

학생들의 과제에서 이런 대답을 읽은 나는 자동적으로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여러분이 상상하는 소련의 '수준 높은' 스포츠는 대중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의무적인 것이었다고 해야 맞고, 학생들은 체육시간을 땡땡이 치기가 일수였다고 말이다(물론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학교 탈의실에는 샤워장도 없었고 성인들을 위한 휘트니스클럽? 그런 건 꿈도 꿀 수 없었으며 수영장 등록을 하려면 '빽'이 없이는 가당치도 않았다고 말이다.

한 여학생은 옛날 소련 시절에는 "집 열쇠를 현관문 앞 발판 아래 두고 다녀도 괜찮았다"고 썼다. 이런 학생에게 우리 집엔 두 번이나 도둑이 들었고, 어머니는 여우털모자를 쓰고 다니다 강도의 칼에 찔렸으며, 아버지는 미제 청바지 때문에 살해당했다는 말을 정말 해줘야 할까? 아니면 작가 아르카디 박스베르크가 '문학신문(Литературная газета)'에 기고했던 무차별 범죄의 잔혹성에 대한 시론에 대해 읊어줘야 하나?

하지만 나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문득 나 자신도 어떤 점에서는 소련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음을 깨달아서다. 기차 쿠페칸 대학생 할인표라던가 한 덩어리에 18코페이카 하던 흑빵 같은 것 말이다.

좀 더 거시적으로 보자면, 소련 시절 우리는 지금은 사라져 버린 어떤 가치들을 누리고 있었고 그것들이 이제는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은 개인적으로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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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첫 번째는 시(詩)다. 내가 싫어하던 아사도프, 나의 영웅 사모일로프, 아니면 사미즈다트(самиздат, 소련에서 문학 작품들과 종교 및 사회평론 저술을 비공식적으로 검열을 피해 유포하는 방식. 이때 저술 사본들은 공식 기관들에 알리지 않고 그들의 허락을 받지도 않고 저자나 독자들에 의해 보통 타자기로 타자된 상태나 사진으로 촬영된 상태, 또는 원고 상태로 제작되었다. 소련 말기에는 컴퓨터를 통해서도 제작되었다. 사미즈다트는 전체주의와 권위주의 국가들에서 권력의 검열을 피하는 문학을 가리키는 말(samizdat)로 영어에 포함되었다)로 배포된 이오시프 브로드스키, 타미즈다트(тамиздат, 이 말은 사미즈다트와 함께 자주 접할 수 있었으며, 때로는 사미즈다트의 반대 의미로도 접할 수 있었다. 타미즈다트는 소련에서 금지되어 "그곳"(там), 다시 말해 소련 밖에서 출판된 서적과 잡지를 가리켰다)로 발행된 로세프의 작품들. 만델시탐의 <보로네시 노트>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이른 기차를 타고> 같은 시집은 하룻밤씩 돌려가며 읽어야 했고 복사본이 만들어졌다. 아흐마토바의 푸른색 시집은 '베료스카' 상점(Березка, 소련 시절 외국인을 대상으로 식료품과 생필품을 외화를 받고 판매하던 상점 망)에서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가격인 6달러에 살 수 있었다. (이 때문에 형을 받을 수도 있었다)

두 번째는 지적 향연이다. 소련 시절 인텔리겐치아(지식인)란 지식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때로는 투쟁을 통해 지식을 추구했던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예를 들어 모스크바국립대 학술도서관은 학부 4학년이 되기 전에는 사용할 수 없었으며, 프로이트와 니체의 서적은 지도교수의 추천서가 있어야만 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과거 독서는 교육받은 사람의 의무였다! 이제 우리는 독서를 쇼핑과 맞바꾸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당시 독서 말고 달리 할 것이 있었단 말인가? 언젠가 헤브라이 어문학자 세묜 야케르손이 말한 것처럼 "할머니가 파이를 굽는 동안 우리가 부엌에 앉아 책을 읽을 때 미국 소년들은 생일 선물로 받은 조랑말을 타고 목장을 누볐"지 않았던가.

물론 이게 중요한 건 아니다. 요즘에는 몇 분이면 전자책 단말기에 브로드스키와 슬루츠키의 전작을 모두 집어넣을 수 있다. 간들렙스키의 세 권짜리 전작 시집도 나왔다! '이반 림바흐' 출판사는 레프 로세프의 전작을 단 한 권에 담아 출판했다. 푸코에서 아도르노, 질라스에서 아프토르하노프에 이르기까지 예전에는 금서로 꽁꽁 봉인되어 있던 서적들을 이제는 마음대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갖춰졌어도 정작 지적 향연은 열리지 않는다. 지식인의 품귀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역설, 그러니까 시는 있는데 시를 읽는 독자는 사라지고, 지적인 독서는 있는데 지식인은 존재하지 않는 현상을 나는 이렇게 밖에 설명할 수 없다. 소련 시절에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하려면 소비에트 체제에 편향되거나 아니면 반체제에 편향되거나 (후자 쪽이 훨씬 즐거웠다) 하면 됐다.

어떤 쪽에 편향했으냐로 자신의 정체성을 가늠하던 시스템은 소련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새로 도래한 세계에서 더 이상 '반체제'로 편향할 수가 없게 된 지식인은 독자적으로 자산의 세계와의 관계를 정립해야 하게 됐다. 그것이야말로 그와 비지식인을 구별해 주는 것이다. 완곡하게 말해 '반골성향'은 이제 존재의 정당성을 상실했다고 할 수 있다. "솔로비요프가 됐건, 칸트가 됐건, 아니면 마르크스가 됐던 누군가에 기대려는 군거 본능은 무재능의 피난처일 뿐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외톨이들이며, 이들은 진리에 처절하지 않은 이들과는 관계를 끊어 버린다." 이 말은 파스테르나크의 <의사 지바고>에 나온다. (물론 파스테르나크는 패러다임 전환기에는 '진리'라는 개념도 진부한 것이 되버린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인터넷과 전자책의 등장, 정보의 즉각적인 복제, 정보 교환상의 거리 소멸은 견고한 공동체의 출현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오히려 이와 반대로 구체적인 동기에 의해 순식간에 형성됐다가 그만큼 재빠르게 흩어지는 관계들을 양산했다.

나는 소련 시절을 겪은 사람들이 왜 '자아실현'이니 '안정' 그리고 '교육', 심지어 '스포츠'까지 들먹이며 아름다웠던 시절이 지나갔음을 통탄하는지 알 것 같다. 그들이 애도하는 것은 교육도 못 받고, 안정을 찾지 못했으며 자아실현의 기회를 놓쳐버린 자기 자신일 뿐이다. 그들은 사회의 아웃사이더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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