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광복 68주년...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일러스트=단 포토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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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 광복절은 남한과 북한이 동시에 기념하는 (물론 각자 방식대로) 유일한 국경일이다. 최근 일본에서 자신은 침략자가 아니었으며 이제 자위대를 정규군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1945년 8월 한반도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반추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연합국 지도자들은 나치 독일이 무너진 뒤 2, 3개월 후 소련이 군국주의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소련과 미국, 영국이 진행한 포츠담회담에서 소련의 극동 전쟁 참가에 대한 얄타 합의가 재확인됐다. 당시 소련은 4월 5일 일본과의 중립조약을 파기하고, 5~7월에는 병력과 군사장비를 극동지역으로 배치하는 등 얄타 합의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해방하려면 다음 두 문제가 관건이었다. 첫째로 제국주의 일본을 항복시키는 것, 두 번째로 일본군과 총독부를 한국 영토와 그에 인접한 중국 땅으로부터 축출하는 것이었다.

1941년 이미 일본과 전쟁에 돌입한 미국은 확실히 첫 번째 문제에 주력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의 지상전 전투능력은 해상전이나 공중전에서만큼 뛰어나지 않았다. 미국이 1945년 7월 필리핀을 해방시키기까지 장장 10개월이 걸린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미국은 지상전 경험이 풍부한 소련군이 참전하지 않으면 일본을 항복시키기 힘들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1945년 8월 6일 미군 폭격기가 히로시마에 첫 번째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이는 군사작전이라기보다는 적에게 공포감을 심어주기 위한 행위로 어마어마한 파괴와 민간인 참사를 초래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이 무서운 신무기의 위력을 아는 사람은 전 세계에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미국과 핵무기 경쟁 중이던 스탈린은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이틀 뒤인 8일 소련은 연합국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일본에 선전포고했다.

8월 9일 소련은 일본을 상대로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그리고 바로 이날(당초 계획은 8월 12일) 미군 폭격기가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다. 훗날 서방 역사학자들은 일본이 핵폭탄 때문에 항복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한반도 전세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소련군이 지상에서 대규모 군사작전을 펼쳐 일본을 제압하지 않았더라면, 군국주의 일본의 저항은 훨씬 더 오래 계속됐을 것이다.

소련군은 중국 동북부와 한반도 북부, 남사할린, 쿠릴열도를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소련군 사령부는 지금의 북한지역으로 정예부대와 제1 극동 전선 소속 부대, 태평양함대 소속 함정과 부대, 그리고 항공기를 투입했다. 8월 12일 이미 소련 국경과 가까운 웅기, 나진 항을 탈환했다. 13일에는 청진을 두고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다음날인 14일 일본 천황은 항복을 뜻하는 종전을 선언했고, 한반도에는 이 소식이 하루 뒤에 전해졌다.

하지만 한국에 남아 있던 일본군은 천황의 명을 즉시 따르지 않았으며 18일이 돼서야 완전히 저항을 멈췄다. 동해안 최대 항구인 원산의 일본 주둔군은 22일에야 소련군에 투항했다. 이틀 후인 24일 일본의 항복을 수용하기 위해 소련 공수부대가 평양과 함흥에 투하됐고, 25일이 되자 한반도 북부의 일본군 무장해제가 완료됐다. 9월 초에는 소련군 일부 부대가 38선으로 접근했다.

한반도의 해방은 처절한 전투 끝에 쟁취한 결과였다. 미군이 한국의 독립 과정에 직접적인 참여를 하지 않은 반면 소련군 부대들은 전투에서 큰 피해를 감수했다. 미국은 8월 28일에야 일본에 상륙했고 며칠 후인 9월 2일 전함 미주리호 선상에서 연합군 대표들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 문서에 조인했다. 미군은 일본의 패배가 확정된 후에야 한반도로 들어왔다. 1945년 9월 8일 시작된 미군의 인천 상륙의 목적은 일본의 항복 수용도, 조선의 독립도 아니었다. 소련군이 한반도 전역을 점령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상륙 작전의 주된 목표였다.

분명히 하자면, 스탈린 치하 소연방이라고 해서 이타적인 생각을 갖고 전쟁에 참여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든 자국의 세력권을 넓히려는 것이 전쟁에서 이긴 초강대국들의 논리였다. 그러한 논리 때문에 '냉전'이 시작됐고 유럽에서는 독일이, 동아시아에서는 한반도의 분단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국제정치 논리에서 파생된 결과를 세계는 지금까지도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서 '만약에'라는 가정은 통하지 않는다. 광복절을 맞아 한반도의 해방에 실질적 기여를 한 것이 누구였고 그 과정은 어떠했는지 다시 되새겨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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