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혐오의 대상”... 러시아 反동성애 정서의 뿌리

(일러스트=단 포토츠키)

(일러스트=단 포토츠키)

‘남색’을 범죄로 규정한 형법조항을 삭제한 지 20년 만에 러시아 당국은 동성애자들에게 채찍을 들었다. 그 결과 지난 수년 간 러시아를 분열시켜온 사회의 골이 더욱 깊게 파이고 있다.

러시아에서는 8월 2일을 '공수부대의 날'로 기념한다. 매년 파란 베레모와 줄무늬 민소매 티를 입은 공수부대원들이 무리를 지어 러시아 곳곳의 도시 중심가에 모여 술을 마시고 목이 터져라 공수부대 찬가를 부르며 몰려 다닌다. 금년 8월 2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게이 인권운동가인 키릴 칼루긴이 '이것은 관용의 선전입니다'라고 적힌 현수막을 들고 상트페테르부르크 드보르초바야 광장에 나타나자 기념일을 자축하고 있던 공수부대원들은 순식간에 현수막을 빼앗고는 칼루긴을 희롱하고 모욕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현장에 있던 특수경찰에 의해 칼루긴은 현장을 벗어날 수 있었고 공수부대원 몇 명이 폭행혐의로 체포됐다. 칼루긴은 이날의 일인시위를 통해서 오늘날 러시아의 동성애 혐오 반응이 얼마나 우발적이며 일상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지 잘 보여주었다.

2013년 1월 25일 크렘린궁의 후원을 받는 콘트르 TV의 안톤 크라솝스키 편집장이 생방송 중 커밍아웃하며 "저는 게이입니다. 그리고 저는 친애하는 시청자 여러분과 푸틴 대통령, 메드베데프 총리, 두마 의원들과 똑같은 인간입니다"라고 말했다. 현재 이 방송 영상은 인터넷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콘트르 TV 홈페이지는 이 영상을 크라소브스키의 회사 계정과 개인 페이지와 함께 삭제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3일 후 크라솝스키는 편집장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의 커밍아웃 사실에 관심을 둔 사람은 없었지만, 대신 '저는 여러분과 똑같은 인간입니다'라는 부분은 여러 사람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크라솝스키가 그의 성 지향성 때문에 해고됐다고 한다면, 그것은 위선이다. 크라솝스키의 상사를 화나게 한 것은 다름 아닌 평등을 운운한 대목이었다. 러시아의 많은 동성애자가 방송계를 비롯해 여러 영역에서 활약하고 있지만, 이들 대다수에게 커밍아웃은 최후의 선택이다. 현대 러시아 사회에서 게이는 아직 아웃사이더다. 리서치기관 레바다 센터가 2013년 4월 시행한 여론조사를 보면 러시아인의 35%가 동성애를 질병으로 여긴다고 응답했고, 43%는 나쁜 습관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동성애가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비율은 12%에 불과했다. 동성애자와 이성애자의 권리가 동등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47%가 '아니다', 39%가 '그렇다'고 답했다. 동성애에 대해 이러한 정서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러시아 동성애의 역사를 잠시 들여다보자.

고대 러시아에서는 교회가 동성애(남색)를 처벌하기는 했으나 그다지 엄하지는 않았고, 이성애에 대한 처벌과 같았다. 중세 문헌에는 게이에 대한 언급이 드물지만, 남아 있기는 하다. 15~17세기에는 특히 귀족 청년들 사이에서 동성애가 일상적이었다. 이반 뇌제도 20대 시절 가깝게 지내던 젊은 귀족들과 동성애 관계를 가졌고, 그중 잘 알려진 상대로는 표도르 바스마노프가 있다. 당시 러시아를 방문했던 외국인들은 사회 전 계급에 남색이 만연하고 있으며 유럽인 방문객이 보기에 놀랍게도 그것이 범죄로 취급되지 않는다는 기록을 남겼다. 동성애가 더 확산되자 17세기 말 젊은 귀족들이 수염을 밀고 화장하고 향수를 뿌리는 것을 막지 않았던 러시아 정교 사제들도 동성애에 대한 비난의 강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역사가 S. 솔로비요프는 훗날 "동양과 서양 어디에도 동성애라는 죄악을 러시아만큼 가볍게 보는 곳은 없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1716년에는 표트르 대제가 동성애에 대한 첫 처벌을 러시아 군대에 도입했다. 동성애 관계가 발각될 경우 체벌형에 처해졌고, 동성 강간죄에 대해서는 추방형이 내려졌다. 18세기 러시아 귀족에게 동성 간 성관계는 아주 평범한 일이었다. 그런데 19세기 들어 러시아와 유럽 간 교류가 늘면서 러시아인은 동성애가 다른 국가에서는 종종 범죄로 인식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점차 자신의 성생활을 숨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직 예술가와 시인, 관리 사이에서는 동성애가 비일비재했고, 그중에는 A. N. 골리친 공후와 S. S. 우바로프 백작도 있었다. 당시에는 동성애를 엄격히 비난하기보다는 다소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데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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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동성애가 예외가 아닌 일상이었던 사립군사학교에서 귀족 대부분이 성장기를 보냈다는 사실도 매우 중요하다. 1832년 니콜라이 1세 치하에서 처음으로 동성애 관계를 범죄로 규정하는 조항이 도입되었고, 발각 시 시베리아 추방이었다. 그러나 이 처벌이 실제로 선고된 경우는 거의 없다. 그것은 상류사회에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추문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19세기 말에 접어들며 반동성애법은 사실상 완전히 폐지되기에 이르렀고, 동성애는 보헤미안 모임이나 황가를 포함한 고관대작 사이에서 성행했다. 1905년 혁명 이후에는 문학검열도 없어져 게이 문학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동성애자가 자신의 감정을 시나 산문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됐다.

볼셰비키 혁명 후 소비에트 연방이 수립되자 동성애 척결은 소비에트 당국이 해결할 과제가 됐다. 1934년에 남색은 다시 범죄로 선언되어 징역형 5~8년을 선고했다. 볼셰비키가 소비에트 연방을 수립할 때 이용한 계급적 접근법에 따라 동성애는 근절해야 할 부르주아의 죄악으로 선언됐다.

공안기관은 오늘날까지도 동성애로 처벌받은 사람 수를 정확히 밝히지 않는다. 미국인 연구자 댄 힐리의 말에 따르면, 1934~1950년 관련 기록은 일부만 남아 있고, 1951~1960년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실제로 몇 명이 동성애로 유죄판결을 받았는지는 미지수다. 공식 통계상으로는 1961년부터 1960년의 소비에트 연방 형사법 121조에 따라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연간 약 1,000명에 이른다. 이 수치는 매년 조금씩 증가해 1961~1981년 사이 동성애로 처벌받은 사람 수는 모두 22,163명이었다. 80년대에는 그 수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1993년에 형사법 121조가 삭제되었다.

구소련 시절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법적 탄압과 보조를 맞춰 심화했다. 이데올로기에 경도되어 어린 시절부터 아이들에게 사회주의 가치를 주입하는 사회에서 동성애는 완전히 금지됐다. 그러는 동안, 감옥이나 수용소에서 동성애는 '버림받은 자'의 상징이 되었다. 새로 들어온 수감자나 감옥의 비공식적인 규칙을 깬 수감자에게 모욕을 주기 위해서 동성 간 강간을 이용한 것이다. 출소한 수감자들은 이러한 동성애의 오명을 '자유 사회'까지 갖고 왔고, 동성애는 저질 인간들의 것이라는 인식이 자연스레 굳어졌다.

1993년에 121조가 폐지되자 상황은 잠시 희망적이 되었고, 동성애에 대한 여론도 완곡해 졌다. 그러나 최근 들어 동성애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다시 높아지고 있다. 그리고 이번에는 중세시대처럼 동성애를 죄악으로 규정하며 늘 반대해온 포스트 소비에트 러시아의 정교회도 힘을 보태고 있다.

이렇게 역사를 살펴보며 알게 되었듯, 러시아에서 동성애에 대한 억압은 표트르 대제나 니콜라이 1세, 스탈린과 같은 권위적인 지도자가 사회적 다양성을 최소화하고 사회가 모든 아웃사이더에 대해 불관용을 갖도록 하려고 도입한 조처다. 지금 러시아에서는 동성애 선전과 동성 간 결혼을 금지하는 법안이 도입되고 있고, 친정부 성향 언론이 반동성애적 수사로 이를 지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으로서는 아직까지 동성애에 대한 형사처벌의 그림자가 러시아 사회에 드리워져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특히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LGBT(성소수자) 운동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고 있으니, 모든 것이 20세기와 같은 모습은 절대 아닐 거라 기대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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