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전야...“놓쳐버린 평화통일의 기회”

(일러스트=단 포토츠키)

(일러스트=단 포토츠키)

7월 27일은 한국전쟁 정전협정 조인 60주년이 되는 날이다.

7월 27일은 한국전쟁 정전협정 조인 6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은 슬픈 기념일이자 한국전쟁이 법률상 종결되지 않았으며 이 전쟁으로 한반도가 남북한 두 국가로 분단되어 수십 년간 대치 중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떠올려주는 날이다. 이 날을 전후해 60년 전 사건들을 되돌아보며 전쟁을 피할 수는 없었는지, 한민족의 분열을 막을 수는 없었는지 고민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1943년 카이로 선언에서 전승국들은 머지않아 "조선이 자유독립국가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또 미국과 소련은 일본군의 항복을 더 효과적으로 이끌어내기 위해 38선을 기준으로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분단하는데 합의했다. 그리고 그것은 1945년 8~9월 현실이 됐다. 그 해 말 소련과 미국, 영국 외상들이 참석한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 상황은 다시 논의되었다. 3국 외상은 남한의 미군 사령부와 북한의 소련군 사령부 대표로 구성된 공동위원회를 설치하여 한반도에 임시민주정부를 수립하는 데 합의했다.

1946년 3월에는 공동위원회가 한반도의 민주단체들과 함께 임시민주정부 구성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를 위한 협의단체 선정이라는 구체적 문제에 이르자 소련과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 차이 때문에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공동위원회 작업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이라는 논의의 장으로 끌고 나갔다.

바로 이 때가 한반도의 미래를 둘러싼 러·미 간 심각한 대립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자신의 이념적 메시아주의(전 세계에 자유와 민주주의의 이상을 전파)에도 불구하고 실제 외교정책에 있어서는 타협과 집단행동이라는 원칙에 입각해 행동해 왔다. 그런 의미에서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회부한 것은 미국의 외교관행으로서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미국 못지않게 이념 중심적이었던 스탈린 시기 소련의 대외정책(소련의 영향권 확대와 사회주의·공산주의 이상 전파)에서는 타협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당시 소련에게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회부한 미국의 행동은 배신으로 여겨졌으며, 그 결과 유엔은 소련과 미국의 알력 다툼의 장으로 변해버렸다(이는 한반도 문제에 국한되지 않았다).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새로 구성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UNTCOK)에 이관한다는 유엔 총회 결의안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감독 하에 총선을 실시해 남북한 단일 정부를 구성한다는 계획이었다.

1948년 4월 평양에서는 남북조선 제(諸)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가 열렸다. 남북 연석회의 참석자들은 사상적 차이(북측의 친공산주의, 남측의 반공주의)에도 불구하고 남북한 총선거 실시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남북한 총선거는 치러지지 못했다. 대신 1948년 5월 UNTCOK의 감시하에 남한 단독으로 총선거가 실시돼 국회가 소집되었다. (소련의 거부로 UNTCOK 대표단 입국이 허용되지 않은) 북한에서도 단독 선거를 치르고 국가 수립을 선포했다.

한반도의 분열은 이렇게 시작됐다. 남북 분단의 비극은 소·미 관계가 급격하게 악화되고 냉전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일어났다. 1948년 8월 소련은 교사들로 구성된 소련 대표단 가운데 두 명을 미국이 강제로 억류한 사건과 관련 미국과의 국교 단절이라는 강수를 쓰기까지 했다(하지만 미국은 소련 교사들이 자의로 미국에 남겠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발표했다). 이런 사실은 이제 사람들의 기억에서 거의 잊혀졌다. .

1948년 12월 12일 유엔 총회는 서울에 수립된 남한 정부를 한반도의 한법정부로 인정하고 점령군 철수를 권고했다. 이에 소련은 1948년 12월 25일 북한 주둔 소련군 철수를 발표했다. 그 와중에도 소·미 두 강대국은 한반도에서 자국의 세력을 계속 팽창시켰고 남북한 정권의 상호 적대감도 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돼 가고 있었다.

냉전이 격화되면서 대량살상무기가 동원되는 열전(熱戰)으로, 더 나아가 세계대전으로까지 번질 뻔한 상황에서 두 열강은 공동 합의를 파기하고 타협과 집단행동이라는 논리는 뒷전으로 한 채 자국의 이익과 야심을 위해서만 행동하고 싶은 강렬한 유혹을 느꼈다. 그러나 과연 한반도 분열의 책임이 외세에만 있는 것일까?

역사에는 가정법이란 없지만, 그래도 이런 생각을 해본다. 1948년 봄에 남북 정당사회단체들이 합리적인 타협을 이끌어내는 데 끈기와 의지를 더 발휘했다면 남북한 총선거 실시는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역사의 방향은 완전히 달라져 동족상잔의 비극과 전쟁(한국전쟁은 내전으로 시작했다)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후로 세대가 바뀌면서 남북 화해를 이루기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그러나 평화회담 외에 다른 해결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전 60주년을 맞이하여 한반도 상황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외부세력들에게 역사를 잊지 않고 과거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래 마지 않는다. 또한 생산적인 남북 대화에 임하도록 더욱 단호하고 끈질지게 자국 정부를 압박하기를 남북한 시민사회 세력들에게 바래 본다.

끝으로, 남북한 지도자들이 과거의 적을 향해 한 발짝 성큼 다가가 '냉전'을 종식시키는 결단력과 의지를 보여준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정치적 용단을 발휘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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