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스캔들’… 새로운 반미주의 촉발하나?

(일러스트=니야즈 카리모프)

(일러스트=니야즈 카리모프)

필자는 이슬람 정치의 미래에 관한 주제로 모로코에서 열린 발다이 클럽(Валдайский клуб) 중동 섹션 학술회의 참석 중에 주러 미국 대사관 3등서기관 라이언 포글이 모스크바에서 간첩 혐의로 체포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당시 회의 참석자들은 새로운 중동에서 러시아와 서방의 상호협력 전망을 논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간첩 사건이 알려진 후에도 러·미 관계의 악화 가능성에 대해 운을 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일부 참석자들은 러시아와 미국이 중동 문제에서 조심스럽게 서로의 입장차를 줄여나가고 있는 것은 긍정적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미국 스파이 체포 작전에 투입된 러시아 정보기관들도 현재 러·미 관계에 흐르는 긍정적 분위기를 잘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그들은 이번 작전으로 양국 관계가 악화될 걱정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브로프 러 외무장관이 스위스에서 케리 미 국무장관과의 회동을 앞두고 라이언 포글 체포 작전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오랜 논쟁거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양국 외교 수장이 가발 세트와 현금 다발, 그리고 구형 휴대폰, 나침반이 든 트렁크를 손에 들고 러시아 정보요원 포섭에 나섰던 미국 스파이에 대한 어찌 보면 첩보소설 같고, 어찌 보면 꾸며낸 얘기 같은 이 스캔들을 거론하지 않은 것은 양국 외무부가 자국 정보기관들이 벌여논 일에 개입할 뜻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양국 외무장관이 이 미묘한 사안의 논의를 고의적으로 피했음은 분명하다. 올해 가장 중요한 외교 사안 중에 하나인 시리아 관련 제2차 국제회의 개최가 임박했기 때문이다. 이 회의에서 러시아와 서방은 시리아 내전에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모든 이해당사국을 참여시키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할 것이다. 

러 외무부가 체포된 라이언 포글을 ‘페르소나 논 그라타’(기피인물)로 지목한 것은 이런 상황에서 당연한 절차일 뿐이다. 이와 함께 크렘린궁도 미국 시민이 TV 카메라 앞에서 떠들썩하게 체포됐음에도 양국 간 신뢰수준을 떨어뜨리는 외교관의 위법행위에 대해 유감을 표하는 수준으로 매우 절제된 반응을 보였을 뿐이다. 

이번 사건이 양국 정보기관 간에 새로운 전쟁을 부추기지는 않을까? 당분간 그런 일은 없을 것으로 본다. 현재 다양한 사안에서 러시아와의 공조를 필요로 하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이번 사건에 대한 적절치 못한 반응으로 양국 간에 조성된 정치적 공조 무드를 손상시키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런 식의 사태 전개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아직 의문이 가시지 않는 것은 미 외교관의 체포가 왜 그처럼 떠들썩하게 진행됐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설명이 있을 수 있다. 필자가 보기에 가장 그럴 듯한 설명은 이번 연방보안국(ФСБ, FSB)의 작전이 미국의 보스턴 테러 수사와 직접적으로 연관돼 있다는 것이다. 

보스턴 테러로 양국 정보기관 사이에는 유쾌하지 않은 ‘힘겨루기’가 시작됐다. 러시아 측은 미국 정보기관에 차르나예프 형제를 조심하라고 경고했으나 미국 측이 이 같은 정보를 받고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미국 측은 러 정보기관이 유용한 정보를 자신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는 식으로 간접적으로 비난했다. 

그럼 여기서 사실들을 복기해보도록 하자. 문제의 주러 미국 대사관 3등 서기관은 차르나예프 형제 관련 정보 등을 갖고 있던 캅카스 담당 러시아 정보기관 직원을 백만 달러에 포섭하려 했다. 미 정부기관에서는 이렇게 입수한 정보로 보스턴 테러사건에 대한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함으로써 미 대통령에게 자신들의 ‘결백을 주장’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CIA의 집요함은 FSB를 발끈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후자는 양국 외무장관 회동 전날 라이언 포글을 전격 체포하게 됐다. 

물론, 이번 사건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냥 마무리되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자국 공관의 3등 서기관이 뭘 하고 다녔는지 몰랐을리 없는 마이클 맥폴 주러 미국 대사의 평판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제 맥폴 대사는 러시아인을 만나는 자리마다 이번 사건과 관련한 곤란한 질문에 답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대다수 러시아 전문가와 정치인들은 이번 사건으로 러시아 사회에 새로운 반미주의가 고개를 들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지금 러시아에서는 이번 사건이 양국 정보기관 권한의 지엽적 사건에 불과하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 미국 언론에서 주장하듯이 이번 체포 작전 뒤에 모종이 정치적 주문이 있었다는 가설 또한 부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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