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 관계 ‘리로디드’

(일러스트=세르게이 욜킨)

(일러스트=세르게이 욜킨)

지난 4월 29일 일본 정상으로서는 10년 만에 러시아를 공식방문한 아베 日총리는 대대적인 규모의 경제사절단을 대동하여 깊은 인상을 주었다. 일본의 다국적 대기업 총수 여러 명이 동시에 한 기자회견에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을 상상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모스크바 기자회견에서 이들 50여 명을 동시에 볼 수 있었다. 다보스나 APEC 비즈니스 포럼에서도 구경할 수 없는 일이 아베 총리의 방러 기간 중 일어났다.

라이프 스타일과 에너지 자원 맞교환

일본 대기업 총수들의 합동 기자회견이 지난 4월 29일 리아 노보스티 통신 모스크바 사옥에서 열렸다. 참석한 대기업 총수들의 이름을 살펴보면, 사사키 노리오 도시바 사장, 하세가와 사토시 가와사키중공업 사장, 사사 히로유키 올림푸스 사장, 오카 마사요시 스미토모중공업 대표, 나카무라 미츠오 닛켄 세케이 대표이사, 코노모토 신고 노무라 종합연구소 상무집행위원, 이토 마사토시 아지노모토 사장, 세키하치 요시히로 홋카이도 은행장 등... 명단은 길게 이어진다.

포브스 기업평가 순위를 들여다볼 필요도 없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기업들이다. 아베 총리의 방러에 대동한 경제사절단 명단은 이밖에 다른 쟁쟁한 이름들로 채워져있다.  

이들이 러시아에 제안한 내용 중에서 특히 눈여겨볼 만한 것으로는 ‘러시아인의 보건 수준 향상과 안락한 생활방식’을 위한 혁신을 들 수 있다. 중점 4개 분야는 도시환경, 식량과 농업, 의학, 에너지절감과 대체에너지다.

이는 일본 측이 방러를 앞두고 ‘관계의 재설정 혹은 재시작’이라고 부른 것을 위한 아주 좋은 출발이다. 실제로 이번 방러는 양국간 새로운 차원의 경제협력에 집중한 인상이 짙다.

이번 러·일 정상회담의 성격은 지난 4월 10일 런던 G8 외무장관 회의에서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 외무장관과 기시다 후미오 일 외무상이 합의한 것이다. 합의의 내용은 러·일 관계 전반에 걸친 '장기적 발전방향을 정립'하기 위해 양국간 정상 방문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국제관계에서 엄밀한 의미의 양자관계란 사실상 거의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번 방문의 경우도 모든 상황을 전체적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일본 정부에 정통한 소식통들은 말한다. 아베 총리는 일본의 새로운 경제 도약을 이루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이를 위해 금융 분야에서 일대 혁신을 추진하고 있으며 에너지자원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일본인들이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공포에 질려 자국의 원전을 꺼리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다. 아베 총리가 러시아를 방문한 이유, 그리고 이어서 중동으로 날아가 아랍국가들과 터키를 방문하는 이유가 바로 이때문이다. 

일본의 이번 러시아 방문 모토는 ‘에너지와 혁신의 맞교환’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이 제시하는 혁신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분야와 연관된 것들이다. 원전 재건이 흥미를 끌 법한데도, 양국간 원자력 협력은 거의 없다. 그러나 블라디보스토크 천연가스 액화기지 건설 사업, 일본행 가스관 건설 사업 등이 얼핏 논의되기도 했다. 모두 향후 세밀한 검토가 필요한 사인들이다. 

러시아 비즈니스 환경에 대해서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러·일 관계의 최대 난제다. 대형 프로젝트 허가를 받기 위해 일본 기업들은 2~3년을 기다려주지 않을 것이다. 그 시간에 중국에 투자하면 벌써 이익을 보고도 남을 것이다. 일본 기업들이 유럽으로 화물을 운송하면서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놔두고 바지선을 쓰더라도 해상운송을 택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서두를 필요는 없어

양국간에 존재하는 다른 문제들은 ‘경제’에 비교하면 그다지 큰 비중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물론 영토분쟁 얘기다. 이 문제에서도 양국 관계만이 아니라 전체 그림을 놓고 볼 필요가 있다.

이전에도 필자가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듯이 우리의 쿠릴 열도가 동아시아에서 유일한 '섬' 문제는 아니다. 일본과 중국, 일본과 한국 사이에도 똑같은 문제가 존재한다.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도 재발했다. 그런데 러시아가 이 바다들에서 2차 대전 종전의 결과를 갑자기 재검토하기로 결정한다면, 중국과 대만, 한국은 이러한 새로운 전례에 근거하여 일본 측에 큰 골치거리를 선사할 것이다.

아베 총리에게는 자신과 직결되는 문제도 하나 있다. 그가 주창한 개혁을 추진하려면 적어도 일정 기간 정권을 유지해야만 하는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일본 총리들(2006~2007년 재임했던 아베 총리 자신을 포함)의 재임 기간은 1년 남짓에 그쳤다. 지금 높은 인기를 끌고 있는 아베 총리가 다시 선거에 나가면 앞으로 최소한 3년은 더 재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한편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임기는 아직 5년 더 남아 있어 대화를 나눌 시간이 있다.

따라서 아베 총리로서는 특히 주변국과의 모든 영토분쟁 문제와 관련해서 선거를 앞둔 시점에 어떠한 종류의 분쟁도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모스크바에서 이 문제와 관련해 나온 성명들은 십분 이해할 만하다. 예를 들어 푸틴 대통령은 자신이 먼저 나서 “평화협정(즉 영토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정상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전까지는 대화 없는 긴 침묵의 기간이 있었다. 이번 방문은 차분한 대화로의 복귀를 의미한다. 그렇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1990년대에는 필자가 보기에 창피하기 짝이 없는 아이디어가 일각에서 개진된 적이 있다. 그들은 ‘일본에게 쿠릴 열도를 주자, 그렇지 않으면 교역과 투자는 물 건너간다’고 했다. 물론 양국 교역량은 지난 해 급격히 늘어 330억 달러 수준에 육박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 투자 상황은 어떤가? 앞서 말한 비즈니스 환경의 개선이 이뤄지기만 한다면, 쿠릴 열도 문제와는 전혀 상관없이도 투자는 더 늘어날 것이다. 쿠릴 열도 문제도 경제와는 별개로 서두르지 말고 진지하게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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