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난 의제’ 할 말 없는 러시아와 미국

(일러스트=니야즈 카리모프)

(일러스트=니야즈 카리모프)

최근 러·미 관계에 이상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관련 뉴스도 대부분 좋지 않다. '마그니츠키' 사건과 이를 둘러싼 양국의 정치적 대응조치에 이목이 집중됐던 작년 연말부터 특히 그렇다. 지난 주말 양국의 '블랙리스트(입국금지 명단)' 맞교환 같은 신경전이 불거질 때마다 정치평론가들은 '신냉전'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냐고 떠들어왔다. 그러나 러·미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것은 분명 아니다. 양측의 블랙리스트 공방 이후 평탄치 못할 것으로 예상됐던 톰 도닐런 미 대통령 국가안보 보좌관의 모스크바 방문이 순조롭게 마무리된 것을 보면 그렇다. 

이런 어정쩡한 안정상태는 두 가지 상반된 느낌을 불러 일으킨다. 우선, 이는 러시아와 미국이 서로의 중요성을 인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양국이 서로 필요한 현안이 있기 때문에 이념이나 정서적 배경과는 상관없이 그 일을 계속해야 하는 것이다. 한편, 전혀 다르게 해석되기도 한다. 서로 무관심한 단계에 이르렀고 기대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양국 간 접촉도 의례적 형태로 축소된 것이다. 컵에 물이 반쯤 들어있는 것을 보고 한 쪽은 "물이 반 밖에 없다"고 하고, 다른 쪽은 "물이 반이나 차 있다"고 하는 형국이다.

현재 러·미 관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과거 수십 년 동안 양국 관계 발전의 바탕이 되었던 균형체제가 완전히 소진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체제의 한 축은 군사전략적 균형이었고, 다른 축은 이념이었다.

냉전 시기에는 두 축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두 초강대국의 세계관은 첨예하게 대립했고, 이념 경쟁은 실제적으로는 핵 억제력의 제휴로 표출됐다. 소련 붕괴 후에는 이런 구조의 균형이 다소 흐트러졌다. 군사전략적 균형이 유지된 반면, 이념이 양국 관계의 한 요소로 남기는 했을지라도 이념적 대립은 사라졌다. 이념의 존재는 러시아가 '올바른' 민주주의의 기준을 충족하도록 만들겠다는 미국의 목표로 나타났다. 러시아는 그러한 기준을 따를 준비가 된 모습을 보인 적도 있지만, 이후로는 더욱 강하게 러시아만의 비전을 고집했다. 어쨌든, 상대적 비중이 달라지기는 했어도 균형의 두 축은 중요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오늘날은 두 주요 개념 모두가 의문에 싸여 있다. 군사전략적 균형은 아직 상징적 의미를 지니지만, 실질적 내용은 줄어들고 있다. 2011년 비준된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은 1970~1980년대의 전례를 답습하는 협정으로서는 마지막이었던 것이 확실하다. 현재 러시아는 무기감축협상에 복귀할 생각이 없다. 미국의 (또 다른 과거 유산인) 미사일 방어체제 탓만이 아니라 떠오르는 핵 강대국들, 특히 그 중에서도 중국의 존재도 한 몫 하고 있다. 즉 전통적으로 미국과 러시아가 독점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분야에 다른 국가들이 진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반대로 미국은 지속적인 무기감축을 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목적은 장기적으로 무기감축 문제를 끝내는 것, 즉 '글로벌 제로'를 달성하는 것이다.

동시에 현대 세계에서 군사전략적 균형은 불필요하며, 모든 국가는 자국이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미사일과 탄두의 양을 스스로 결정할 자유가 있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이는 아직 지배적인 견해는 아니지만, 그 뒤에 있는 논리는 전 세계적 재정문제와 적자에 시달리는 요즘에 설득력을 얻을 공산이 크다.

이념 문제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러시아를 '바꿔놓겠다'거나(클린턴 대통령 재임 시) 미국이 만든 질서를 인정토록 하겠다는(부시 대통령 재임 시) 미국의 희망은 사라졌다. 우선순위도 변했다. 오바마는 러시아를 변화시키려는 시도는 의미도 소용도 없으며, 러시아는 결과적으로 미국의 대외정책 수행에서 부차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 때문에 마그니츠키 명단이라는 기치 아래 벌어지는 '인권전쟁'에 깊이 관여하는 일도 꺼린다. 미국 정부는 러시아와 실무적 공조체제를 유지하는 쪽을 원하며, 러시아가 미국과 동맹을 맺어 뜻을 같이 하게 만들 생각은 없다. 마찬가지로 러시아식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을 다른 모종의 목적을 위한 '공성퇴'로 활용할 계획도 없다. 한편, 러시아는 자국에 압력을 가하거나 개입하려는 어떤 시도도 용납하지 않고 있지만, 대체적으로 '작은 일'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이러한 실용적 태도는 다른 대안들을 실질적으로 평가해 봤을 때 그렇게 나쁘지 않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관계 약화로 이어져 양국 외무장관급에서 국제문제 해결에 참여하며 다소 성공을 거두기도 하지만, 그 이상은 없었던 과거의 외교 관행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러시아와 미국 사이에는 양자 간 논의주제가 곧 바닥을 드러낼 것이고 이란,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북한 문제 같은 국제문제에서의 공조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새로운 세계질서 속의 이해관계를 인식하게 되면서 양국의 특별한 공동 관심사가 생겨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언제 있을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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