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원자탄... 핵실험 66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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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8월 29일 소련 최초의 원자탄 ‘RDS-1’의 성공적인 실험이 이뤄졌다. 소련의 원자폭탄 제작에 있어서 정보전은 상당한 역할을 했다. 미국의 원자탄 연구 정보를 사전에 입수함으로써 소련 과학자들은 실수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스톡홀름국제평화문제연구소의 2015 보고서 자료에 따르면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인도, 파키스탄, 북한을 포함한 몇몇 국가들이 현재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는 총 15,850여개에 달한다. 그중 약 1,800개는 완전 전투준비태세에 놓여있다. 군비경쟁의 역사는 60여 년 전에 시작됐다.

성공적인 실험

1949년 8월 29일 오전 7시 정각 세미팔라틴스크 실험장 및 그 주변은 눈부신 섬광으로 빛났다. 전선에서 스파크가 튀었고 그후 갑작스런 정적이 찾아왔다. 소련 최초의 핵폭탄 RDS-1의 실험이 성공적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소련의 원자폭탄 개발은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에 이미 시작됐다. 영국의 소련 스파이들은 기밀로 분류된 원자력 관련 학술논문을 소련측에 전달했다. 몇몇 미국 핵연구기지에도 소련 스파이가 심어져 있었다.

“이들이 우리측에 전달한 미국의 플루토늄 폭탄에 관한 자료들 덕분에 RDS-1 개발에서 여러 실수들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고 개발 기간을 단축하고 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 전러시아실험물리학연구소(RFNC-VNIIEF) 소장을 맡고 있는 발렌틴 코스튜코프 교수가 Russia포커스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국가 안보 위협

미국, 영국, 러시아는 1940년대부터 군비경쟁에 돌입했다. 1941년 말 미국은 핵개발에 엄청난 예산을 배정했다. 그 결과 플루토늄을 기반으로 한 일단식 폭탄 ‘가제트(Gadget)’가 탄생했고 실험은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 주의 사막에서 실시됐다.

‘과시용 핵실험’의 시대가 왔다. 미국은 세계, 특히 소련에 자국의 새로운 능력을 과시하고 싶었다. 2차대전을 승리로 끝내기 위해 나치독일의 동맹국인 일본에 타격을 입히기로 결정됐다. 1945년 8월 6일 ‘꼬마(Little boy)’라는 이름의 핵폭탄이 히로시마에 투하됐고, 8월 9일에는 ‘뚱보(Fat man)’가 나가사키에 떨어졌다. 수십만 명의 무고한 시민이 불과 몇 초 사이에 사망했고 나머지는 방사선 피폭으로 고통 속에서 죽어갔다.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은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최대한 빨리 자체적인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이 국가안보의 최대 과제가 됐다. 소련의 원자탄 개발은 이고리 쿠르차토프, 표트르 카피차 등 유수의 과학자들에 의해 진행됐다.

스파이와 과학자들의 공조가 이뤄낸 승리

스파이들로부터 얻은 정보 덕분에 소련 물리학자들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미국의 프로토타입에 적용된 많은 기술적 해결방법들이 이상적인 것은 아니었음이 처음부터 분명했다.” 코스튜코프 교수는 이렇게 생각한다. “심지어 개발 초기부터 소련 전문가들은 폭탄 전체뿐만 아니라 그 개별 부품에 관해서 더 나은 해결법을 제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가 지도부의 요구는 최소의 리스크로 확실하게 진짜 폭탄을 얻는 데 있었다.”

세계 핵탄두 보유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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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핵탄두 보유 현황

이미 검증된 미국 프로토타입을 적용하는 것이 당시의 극도로 과열된 상황에서 취할 수 있었던 유일한 선택이었다고 코스튜코프 소장은 말한다. RDS-1의 구조는 ‘뚱보’를 따라 했고, 탄도체와 전자장비는 소련이 자체적으로 개발한 것이었다.

“당시 우리 과학자들에게 주어진 열악한 장비와 여건을 고려할 때 1940년대에 그들이 이뤄낸 결과는 믿기 힘든 것이었다.” 전러시아기술물리학연구소(RFNC-VNIITF)의 바딤 시모넨코 부학술책임자가 평했다. “이 연구는 높은 에너지 밀도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이해하는 길을 열어줬다. 이는 예를 들어 열핵 연소, 신성의 섬광과 초신성의 폭발, 소행성과 행성의 충돌 등이다.”

‘서류상의’ 평화

소련이 자국 핵무기를 제작하고 있다는 정보는 미국 지도부를 본격적으로 긴장시켰다. 1949년 7월 ‘트로얀(Trojan)’ 계획이 나왔는데, 이에 따르면 미국은 소련 70개 도시에 원자폭탄을 투하할 계획이었다.

그들은 러시아에서 핵무기가 1954년에나 개발될 것이라 확신했으나, 소련은 1949년에 이를 성공시켰다. 세미팔라틴스크 핵실험 성공은 미국의 핵무기 독점에 종지부를 찍었다.

“자국 핵무기가 없었다면 소련은 머지 않아 사라졌거나, 잘 해 봐야 미국에 완전히 종속됐을 것이다.” 역사학 박사이자 모스크바국립대학교 역사학부 교수인 알렉산드르 브도빈이 말한다.

1970년 핵확산금지조약(NPT)이 발효됐다. 현재 이 조약 참가국은 188개국이다. 1996년에는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이 조인됐다. 이후 이뤄진 핵실험들은 조약 비조인국인 인도, 파키스탄, 북한이 실시한 것이었다.

미국과 러시아에는 몇 개의 핵탄두가 있을까?

소련은 핵탄두 보유수에서는 1977년에, 미사일 보유수로는 1969년에 미국을 추월했다. 미국의 핵잠재력은 1967년 최대 에 달해 약 31,255개였고, 소련은 1985년에 45,000개였다. 현재 러시아와 미국은 현행 협정의 조건에 따라 1년에 2회, 3월 1일과 9월 1일에 자국 핵전력에 관한 정보를 교환한다. 2014년 9월 1일 기준 자료에 따르면 러시아는 다양한 운반체용 핵탄두 1,643개를, 미국은 1,642개를 보유하고 있다.

핵폭탄을 보유한 국가는?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핵무기 실험이 총 2,000회 이상 실시됐으며, 공식적으로는 8개 국가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소련은 1949년에서 1990년까지 715회의 실험을 실시했다. 미국의 경우 1945년부터 1992년까지 1,000회 이상 실시했다. 현재까지 미국은 핵무기를 실제로 사용한 유일한 국가로 남아있다. 미국과 소련 외에 영국, 프랑스, 중국, 인도, 파키스탄 및 북한에서 핵무기가 제조됐다. 이스라엘에 핵무기가 있다고 여겨지나, 이스라엘은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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