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랴크’ 호의 역사는 계속된다

(사진제공=레뱐트/리아 노보스티)

(사진제공=레뱐트/리아 노보스티)

2014년은 일본과 러시아 함대 사이에 벌어진 전설적인 제물포 해전이 110주년을 맞이한 해였다. 이 해전 결과 순양함 바랴크호가 침몰했다. 올 한 해 동안 연구자들은 지난 10년간 제물포 해전에 관해 알아낸 새로운 사실들에 대한 결론을 짓고 러시아지리학회 본부에서 진행된 원탁회의에서 그 결과를 발표했다.

전문가들은 바랴크호의 침몰과 그에 대한 국제사회의 반응이 전쟁사상 하나의 역설이었다고 지적한다.

"그것을 과연 전투라 할 수 있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적함들은 침몰되지 않았으며, 바랴크는 사실상 자살를 감행한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는 위대한 정신의 승리이자 충성의 표시였다." 알렉산드르 발리베르딘 러시아 정부 직속 해양협의회 책임위원의 말이다.

일본의 비사(秘史)

바랴크호를 둘러싼 이야기에는 기술적 차원의 의문점들이 많이 남아 있다. 하지만 제물포 해전 100주년 기념식 이후 발표된 자료들 덕분에 주요 순간들에 대한 사실을 밝혀낼 수 있었다. 이전에는 일본과 러시아 해군 참모본부 위원회들에 의해 작성됐지만, 서로 큰 차이가 있었던 보고서들이 제물포 해전 연구의 기본 자료가 되었다.

바랴크 관련 책 13권을 쓴 역사학자 빅토르 카타예프의 말에 따르면 제물포 해전을 둘러싼 연구자들의 논쟁은 '메이지 37~38년 러-일 해전 극비사'가 공개되면서 종지부를 찍었다. '비사'는 일본 방위성 연구소에 보관돼 있으며 이전과 마찬가지로 접근이 제한돼 있기는 하지만, 연구자들은 필름으로 찍은 사본을 열람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은 제물포 해전을 꾸임 없이 기록한 실록을 145권으로 묶어 편찬했는데, 그중에서 28권은 필사본으로만 엮여 있었다. 일본 정부가 그 내용을 극비로 간주하여 활판 인쇄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록에는 일본 정부의 외교와 국방, 첩보 관련 실제 계획들, 국방장관의 명령과 지시, 전투 보고, 도표와 도해들이 담겨 있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 몇 권이 파기되긴 했지만, 나머지 110권은 미군이 살려내 1951년 일본에 돌려줄 수 있었다.

러시아 자료들과 비교할 때 일본의 '비사' 자료들은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전체적 정황을 어느 정도 충분히 복기할 수 있게 해준다. 특히 이 자료들은 일본과 러시아 역사학자들이 누가 먼저 전투를 시작했는지를 둘러싸고 벌써 100년 동안 논쟁해온 의문점에 해답을 제공해준다. 공식 보고서와는 다르게 '비사'는 일본 어뢰정 '하리'호가 1월 26일 러시아 포함 코레예츠에 포격을 가했으나 명중시키지는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사'는 또 일본 정부의 러시아군 공격 계획도 폭로하고 있다. 노일전쟁은 뤼순 항이 아니라 바로 제물포에서 시작될 수도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무라카미 가쿠이티 일본 순양함 '치요다'호 함장은 제물포에 정박해 있던 모든 외국 군함과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비밀 공격 계획도 세우고 있었다. 그는 1월 24일 밤 치요다호가 영국 군함 탈보트호의 엄호 속에 바랴크를 공격한다는 기동연습 계획을 수립했다. 그런데 도쿄에 있는 일본 국방부는 국제 규범 준수 필요성을 근거로 내세우며 기동연습을 금지했다. 하지만 일본 국방부는 단순히 러시아군이 이 기동연습에 깜짝 놀라 바짝 경계하지는 않을까 염려했을 뿐이었던 것으로 '비사'는 적고 있다. 1월 26일에서 27일로 넘어가는 새벽 뤼순 항에서 러시아군을 공격하기로 계획돼 있었기 때문이다.

'비사'는 제물포 해전의 일부 결과도 새롭게 밝혀주고 있다. 공식적으로 일본은 어떤 피해도 입지 않았다고 전했지만, 기밀문서들에는 그와 반대되는 내용이 적혀 있다. 러시아군 포탄은 발사 후 폭발하지는 않았지만

일본 군함들을 관통하여 적군에게 손실을 입힌 것으로 나와 있다.

전투 목격자들

일본의 '비사' 외에도 미국 의회가 공개한 포함 '빅스버그'호 함장 알렉산더 마샬의 일기도 제물포 해전을 연구하는 데서 새로운 자료가 되었다. 이 일기에는 희귀 사진들이 담겨 있는데, 그중 하나에는 응전을 위해 제물포에서 출항하는 바랴크호와 코레예츠호의 모습이 찍혀 있다.

러시아지리협회에 모인 역사학자들은 제물포에서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중립국 함선에 타고 있다가 전투를 목격한 선원과 신문기자들의 사진과 보도가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러시아 해군의 무훈 소식이 세계에 매우 빠르게 퍼진 것도 바로 이들 덕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반응은 제물포 해전이 실제로 뭔가 영웅적인 차원을 띠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는 심지어 그 후 11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국제관계의 일부 양상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모스크바국립대학교 교수인 역사학자 안드레이 하진의 말이다.

하진 교수는 세계의 몇몇 도시에서 기념비 제막과 보존 유물의 러시아 전달 협상이 논의 중이라고 덧붙였다. 예를 들면, 2009년 한국의 인천시는 바랴크와 코레예츠의 안드레이기와 선수기를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에 임대해주었다. 하진 교수는 한국이 제물포 해전 이후 유물을 매우 정성껏 보관해왔다고 지적했다. 한국에는 제물포 해전이 그 이후 벌어진 일본 점령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2006년에는 아일랜드 해 연안에 있는 스코틀랜드의 렌델푸트 마을에 '바랴크' 호 기념 현판이 제막됐다. 수리를 거치고 몇 차례 주인이 바뀐 '바랴크'호는 1920년 이 마을 부근에서 예인선에 끌려가던 도중 암초에 부딪혀 마침내 침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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