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은세기 문학에 녹아든 한국의 여류시인 문정희

마리야 솔다토바와 예카테리나 포홀코바 교수.

마리야 솔다토바와 예카테리나 포홀코바 교수.

에브게니야 아꿀로바
문정희 시 번역한 한국어과 교수들, “문정희는 열정적인 시인”...재미난 번역 수업 에피소드 소개

2016년 7월 문정희 시인의 러시아어 번역시집 ‘바람의 눈을 따라(Вслед за ветром)’가 러시아에서 출간됐다. 번역은 예카테리나 포홀코바, 마리야 솔다토바, 인나 판키나 3인이 맡았다. 한국에서 출판된 시인의 시집 중에는 이런 제목이 없다. 번역진이 러시아 독자들을 위해 엄선한 시들로 새로 구성한 시집이기 때문이다.

문정희 시인의 작품을 번역한 예카테리나 포홀코바 교수와 마리야 솔다토바 교수는 모스크바국립외국어대학교(MSLU)에서 한국어를 가르친다. Russia포커스와의 대담에서 두 사람은 번역 과정에 대한 그 동안의 관찰 결과, 번역 과정에서 발생하는 ‘퇴화’와 ‘진화’의 문제, 그리고 얼마 전 러시아 전국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개최된 러시아 한국어 경시 대회의 결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었다.

러시아 ‘은세기’에 녹아든 한국 여류시인

-어떤 이유로 문정희 시인의 작품을 번역하게 됐나? 어떤 기준으로 번역에 임했나?

(포홀코바) “재미있는 질문이다. 우린 이 질문만 받으면 즐겁다. 문정희 시은은 용감한 분이다. 시인께서 직접 자신의 에이전트이자 친한 친구인 분을 통해 나와 솔다토바 선생님께 접촉을 취해 자신의 시를 러시아어로 번역해달라고 제안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자신의 시집을 선물했고 그 점에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한다. 인나 판키나도 번역 작업에 동참했다. 한국측에서 우리에게 번역집에 들어갈 시를 직접 고르라고 했는데, 번역자 셋이 고른 시가 거의 일치해서 깜짝 놀랐다.

(솔다토바) “총 200편의 시 중에서 60편을 골라야 했다. 세 번역자가 각자 고른 시를 시인에게 전해드렸다. 문정희 시인이 우리가 고른 시를 연대순으로 정리해주었다. 그러고 보니 시인이 성숙해져가는 과정, 나이 들어 가는 과정이 보였고…(이 말을 하면서 솔다토바 교수는 철학적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것을 들여다 보는 작업은 매우 흥미로웠다.”

(포) “번역할 작품 선정 작업이 끝났을 때 한국문학번역원(KLTI)에서 관심을 보이며 지원 의사를 밝혀 왔다. 그렇게 번역원의 지원으로 이 프로젝트를 마칠 수 있었다.”

(솔) “그러나 먼저 문정희 시인이 자신의 시를 번역해달라는 제안을 우리에게 해왔고, 우리가 이에 동의함으로써 모든 것이 시작됐다.”

(포) “한국문학번역원의 번역지원 대상 목록을 보면 저자와 작품 선정이 러시아 독서 현실에 맞지 않는 경우가 가끔 있다. 우리 경우에는 다행스럽게도 문정희 시인의 시 중에서 우리가 러시아 독자들의 구미에 맞고, 호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본 작품을 직접 선택할 수 있었다. 이는 상당히 중요한 대목이다.

2016년 7월 8일. 모스크바의 M. I. 루도미노 기념 외국문학도서관에서 열린 문정희 시인의 러시아어판 시집 발간회. 문정희 시인(1947년생)이 독자들 앞에서 자신의 시를 낭독하는 모습.. 출처: 에브게니야 아꿀로바/Youtube

-문정희 시인과 직접 만났다. 어떤 인상을 받았나?

(솔) “문정희 시인은 1947년 생이다. 중년의 나이인데도 상당히 젊어 보였다.”

(포) “(흥분해서) 정말 열정이 넘치는 분이다!”

(솔) “러시아 ‘은세기’(19세기말-20세기초 러시아를 풍미한 문예사조 - 편집자주)의 여류시인을 연상시킨다. 이 점에 있어 포홀코바 선생님도 나와 같은 의견이다. 은세기에는 사회적인 차원 그리고 세계적인 차원에서의 자아 실현, 창조적 자아 실현에 큰 의미를 두는 진취적인 여성 시인들이 출현했다.”

(포) “문정희 시인의 작품에도 그런 시들이 있다. ‘그 많던 여대생들은 어디로 갔는까’라는 시가 그 중 하나다."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학창 시절 공부도 잘하고
특별 활동에도 뛰어나던 그녀
여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시에도 무난히
합격했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가
 
감자국을 끓이고 있을까
사골을 넣고 세 시간 동안 가스불 앞에서
더운 김을 쏘이며 감자국을 끓여
퇴근한 남편이 그 감자국을 15분 동안 맛있게
먹어치우는 것을 행복하게 바라보고 있을까
설거지를 끝내고 아이들 숙제를 봐주고 있을까
아니면 아직도 입사 원서를 들고
추운 거리를 헤매고 있을까
당 후보를 뽑는 체육관에서
한복을 입고 리본을 달아주고 있을까
꽃다발 증정을 하고 있을까
다행히 취직해 큰 사무실 한켠에
의자를 두고 친절하게 전화를 받고
가끔 찻잔을 나르겠지
의사 부인 교수 부인 간호원도 됐을 거야
문화 센터에서 노래를 배우고 있을지도 몰라
그리고는 남편이 귀가하기 전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갈지도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을까
저 높은 빌딩의 숲, 국회의원도 장관도 의사도
교수도 사업가도 회사원도 되지 못하고
개밥의 도토리처럼 이리저리 밀쳐져서
아직도 생것으로 굴러다닐까
크고 넓은 세상에 끼지 못하고
부엌과 안방에 갇혀 있을까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
 
Куда подевались те студентки?
 
Она училась прилежно,
Секции и кружки посещала,
Диплом получила с отличием,
Экзамены без проблем сдавала.
Где же теперь она?
 
Варит суп благоверному?
Стоит у плиты часами,
Горячий пар от кастрюль вдыхает.
С умилением наблюдает, как после работы,
Он уплетает ее стряпню.
Может, в поисках новой работы
Бродит по замерзшим улицам?
Быть может, в числе патриотов,
В местном доме культуры
Выбирает от партии кандидата?
Возможно, в магазине цветочном
Составляет букеты для торжественных случаев?
А может удачно устроилась на работу?
В огромном офисе у нее свой стул и стол,
Вежливым голосом на звонки отвечает,
Чай иногда подносит.
Могла стать женой врача, профессора, медсестрой.
Не знаю, может, ходит на курсы вокала,
А после несется домой вприпрыжку,
Чтобы успеть к приходу мужа.
 
Куда подевались те студентки?
В частоколе высотных зданий
Членами парламента, министрами, врачами
Профессорами, сотрудниками компаний
Так и не стали.
Не заметны.
В этом огромном мире
Места своего найти не смогли.
Неужели их место на кухне?
Куда подевались они?
 
Перевод Екатерины Похолковой

(포) “은세기 여성이란 다시 말해 정치 의식이 투철하며 사회 안에서 자아를 실현한 여성, 집안일 말고도 무언가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여성들이다. 문정희 시인의 시를 읽다 보면 과연 그녀가 아이를 가진 사람인지 아닌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솔) “러시아 은세기의 여류시인들의 시를 보아도 마찬가지다.”

(포) “문정희 시인은 예세닌을 좋아한다고 하는데 이 점도 흥미롭다. 그녀는 예세닌이 매우 시적이라고 말했다.”

(솔) “지난 여름 문정희 시인의 러시아어판 시집 발간회에서 예세닌에 대한 시(‘겨울 호텔’)에 등장하는 ‘늑대의 울부짖음’이 무엇을 상징하느냐는 질문에 문정희 시인은 꾸미지 않은 ‘야생의’ 사랑이라고 답했다. (이 대답만 보아도) 그녀는 ‘길들여지지 않은’ 여성이다.”

(포) “그 시는 솔다토바 선생님이 번역하셨는데, 예세닌의 싯구를 그대로 옮겨 놓은 부분이 있다.”

(솔) “한국어로 옮겨진 예세닌의 싯구를 다시 러시아어로 번역할 수는 없지 않은가! 예세닌의 원시 구절을 그대로 삽입하고 나서 그 운율과 압운에 맞춰 나머지 부분을 엮어나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이 작업을 해냈는데 그런 작업을 다시 할 수 있겠냐고 묻는다면 ‘노’다.”

겨울 호텔
- 상트 페테르부르그에서

절뚝이며 따라온 달 속에서
밤새 늑대가 울어요
백야처럼 눈부신 무희의 맨발이
하늘도 뚫을 만큼 빛나는 시인의 이름을 불러요

신의 손으로도 만류할 수 없던
미친 사랑의 끝은

왜 고작 결혼이어야 했을까요
번쩍이다 사라지는 오로라일 뿐이었을까요

이 세상에서 죽는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지
하지만 산다는 것 역시 더 새삼스러울 것 없는 일이지

팔목을 가르고 피로 쓴 천재의 절명시가
차가운 무명 시트처럼 깔려있는 겨울 호텔

아무것도 없네요
어두운 불빛 속 절뚝이며 따라온 달 속에서
늑대들이 시베리아처럼 울부짖을 뿐...

예세닌의 시; 그는 이사도라 던컨과 첫 날밤을 보낸
앙글르테르 호텔방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Зимний «Англетер»
– В Санкт-Петербурге

На луну, которая его преследует, шатаясь,
От заката до рассвета воет волк.
А в гостинице танцовщица босая, ослепительнее белых питерских ночей,
Окликает гениального поэта, ярче небосвод пронзающих лучей.

Почему венцом любви безумной,
Что воления богов была сильней,
Стал лишь брак?
Мерцанье северной авроры?

В этом мире умирать не ново,
Но и жить, конечно, не новей.

Эпитафия, начертанная кровью.
Зимний «Англетер» под кровом снежных простыней.

Не осталось ничего, все звуки смолкли.
Только дико, как в Сибири, воют волки.

Перевод Марии Солдатовой

번역에 대한 기능주의적 접근

(포) “지난 10월 12일 MSLU에서 러시아 한국어 경시 대회가 열렸는데, 한국어에서 러시아어로의 번역 부문이 포함돼 있었다. 나를 포함한 출제진은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제목의 텍스트를 골랐다. 경시 대회에 참가한 학생들의 시 번역 능력을 보고 싶었다.”

(솔) “학생들이 제출한 번역을 심사하면서 정말 많이 웃었다.”

-왜 웃었나?

(포) “의외로 참가자들의 러시아어가 너무 형편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MSLU 번역대학 학장이 내게 한 말이 생각나더라. 그는 외국어를 배우는 사람이 어느 단계에 이르면 모국어인 러시아어 수준이 형편 없이 나빠지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했다.”

(솔) “(웃으며) 아니, 만약 참가자들의 한국어라도 잘했으면 나도 웃지 않았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번역의 기능주의적 측면이다. 다시 말해 원문 텍스트가 무엇을 위해 쓰여졌는가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번역 과제로 제시한 텍스트는 독서를 권장하는 내용이었다. 텍스트 속에는 한국의 여러 도서관에서 실시하고 있는 ‘사랑의 책 보내기’라는 슬로건이 나온다. 학생들은 이 슬로건을 ‘사랑의 책을 너에게!(Книга любви - тебе!)’ 아니면 ‘책에게, 사랑을 담아(С любовью, книга)’라는 식으로 번역했더라.

나중에 실용 번역 수업에서 나는 학생들과 이 구절을 놓고 분석했다. 한 여학생이 ‘좋아하는 책을 보내라(Отправь любимую книгу)’라는 번역을 제안했는데, 이것은 부정확한 번역, 더 정확히 말하면 오역이다. 하지만 슬로건 자체로는 썩 나쁘지 않다. ‘사랑의 책 보내기’ 운동의 의미는 다 읽은 책을 집에 쌓아두지 말고 책을 구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보내주자는 것이다. 이 점을 고려하면 이 여학생의 번역은 의미상으로는 오역일지라도 기능주의적으로는 잘 된 번역이다.

결론적으로, 금년 한국어 경시대회의 경우 참가한 학생들의 러시아어가 가장 아쉬웠다.”

(포) “우리 학생들은 정말 열심히 한국어를 공부하고 이에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인다! 아쉽게도 그러는 사이 모국어 또한 갈고 닦아야 되는 대상이라는 사실은 잊고 있다.”

(솔) “솔직히 모국어를 잘하려면 다독(多讀)을 해야 한다.”

(포) “나도 같은 생각인데, 한국 학생들이 내 말에 반대를 해서 좀 놀란 적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매일 읽는 책의 양이 어마어마하다고 내게 항변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한 책들은 정보성 텍스트이지 문학 작품이 아니다.”

(솔) “어떻게 하면 문학번역을 잘 할 수 있냐는 질문도 자주 받는다. 내 생각에 문학 번역을 하려는 사람은 무엇보다 삶의 연륜을 쌓아야 한다. 학생들과 수업을 하다보면 한국어 자체를 이해 못 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 속에 담긴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살며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행동하면서 스스로 경험을 내면화시켜야 한다.”

-좋은 한국학자가 되고 싶어하는 러시아 학생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라.

(포) “나는 한국에 가는 학생들에게 깊은 사고와 주의력, 인내심을 가지라고 충고한다. 이러쿵저러쿵 평가 먼저 하려 들지 말고, 우선 관찰을 하라고 말이다. 그것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사람의 바른 자세다. 내 눈에 이상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은 오히려 내가 제대로 알 지 못하기 때문일 수 있으니까.”

(솔) “나는 반대로 학생들에게 충고하는 편이다. 좋은 학자란 ‘한국-러시아’라는 틀에서 벗어나 더 폭넓은 사고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것들은 세계적인 또는 지역적인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뭔가를 비교하려 들기 전에 ‘혹시 이건 세계적인 현상이 아닐까? 비교의 대상이 아닌 건 아닌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필요가 있다. 자국 문화나 타국 문화의 위치와 의의를 평가하려면 세계 문화 전반에 대한 더 많은 지식이 필요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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