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바이올린이 된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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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베를린 장벽 옆에서 첼로를 연주하는 로스트로포비치 북한 방문 중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과 나란히 선 로스트로포비치 다차(별장)에서 솔제니친과 함께 한 로스트로포비치 어린 장한나와 함께 한 로스트로포비치 타임(Time)지는 그를 우리 시대에 가장 유명한 음악가로 선정하기도 했다.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는 1927년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서 태어났다. 피아노 연주자인 어머니, 뛰어난 재능의 첼리스트였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로스트로포비치는 네 살에 이미 피아노와 첼로 연주를 시작했고, 열세 살에는 오케스트라와 첫 협연을 했다.

1945년.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사진제공: 아나톨리 가가린1945년.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사진제공: 아나톨리 가가린

그는 16세에 모스크바음악원에 입학했다. 1945년 졸업을 몇 개월 앞두고 그는 전연방 음악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이 승리를 기점으로 이후 반세기 동안 이어진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의 눈부신 음악가로서의 삶이 시작된다.

사람의 마음을 끄는 재능

로스트로포비치, 갈리나 비시넵스카야 그리고 그들의 딸. 사진제공: 숄로모비치/리아노보스티로스트로포비치, 갈리나 비시넵스카야 그리고 그들의 딸. 사진제공: 숄로모비치/리아노보스티

로스트로포비치의 재능은 단순히 뛰어난 기교와 정열적인 연주스타일, 호방한 성격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의 혀짧은 듯 빠른 말투와 우아한 유머, 상대를 배려하는 상냥한 태도에 그를 만난 모든 이들이 그를 좋아했다.

1950년대 초 프라하에서 열린 전통 음악축제에서 그는 볼쇼이오페라단의 프리마돈나 갈리나 비시넵스카야를 만났다. 이 늘씬한 미녀에 첫눈에 반한 그는 그녀를 아내로 맞겠다고 결심했다. 당시 비시넵스카야는 기혼인 상태였지만, 이에도 그는 굴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이전까지 격정적인 애정사를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결혼으로 그들의 향후 운명은 사적인 면에서 그리고 음악가로서의 삶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1990년.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와 갈리나 비시넵스카야. 사진제공: 블라디미르 뱌트킨/ 리아노보스티1990년.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와 갈리나 비시넵스카야. 사진제공: 블라디미르 뱌트킨/ 리아노보스티로스트로포비치는 아내의 피아노 협연 하에 수많은 공연을 가졌다. 여러 해가 흐른 후 그는 지휘자로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그가 지휘를 맡고 아내인 비시넵스카야가 타티야나 역을 맡은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은 볼쇼이극장의 전설적인 공연 반열에 올라 있다.

작곡가들의 뮤즈

로스트로포비치가 스무 살이 겨우 넘었을 때 위대한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는 그를 위해 심포니콘서트곡을 썼다. 그런가 하면 몇 년 후 쇼스타코비치는 그에게 바치는 첼로협주곡 1번을 작곡했다.

로스트로포비치의 뛰어난 연주 실력 외에도 현대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를 위한 그의 정열이 작곡가들에게 영감이 됐다. 이후 브리튼, 하차투랸, 슈니트케 등이 로스트로포비치를 위한 곡들을 썼다. 덕분에 그는 117개 곡을 최초로 연주한 첼리스트가 됐다. 심포니 지휘자로서 그는 70개가 넘는 작품과 9개 오페라의 세계 초연을 지휘했다.

로스트로포비치와 보리스 옐친 러시아 최초의 대통령. 출처: AP로스트로포비치와 보리스 옐친 러시아 최초의 대통령. 출처: AP

위험한 우정

그는 항상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고 음악만큼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에게는 음악계 동료들 외에도 다방면에서 엄청난 인맥이 있었다. 한번은 그가 콘서트를 위해 랴잔을 찾았는데 당시 ‘이반 데비소비치의 하루’ 발간으로 대단한 명성을 누리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과 친분을 쌓게 됐다.

몇 년 후 솔제니친이 중병에 걸리자 그는 자신의 다차(별장)에 와서 휴양할 것을 권했다. 그 직후 솔제니친이 소련 정부의 눈밖에 났을 때도 로스트로포비치는 그를 내치거나 많은 이들이 그랬듯이 그와의 관계를 단절하지도 않았다. 솔제니친은 해외로 추방되기 전까지 로스트로포비치의 다차에서 머물렀다. 그는 소련 당국이 곧 로스트로포비치 부부의 소련 국적을 박탈함으로써 이러한 우정의 대가를 치렀다. 하지만 해외로 강제 추방된 이후 부부는 음악가로서 더 탄탄대로를 걷게 됐다.

세계의 남자

로스트로포비치와 보리스 옐친 그리고 러시아 최초 대통령의 아내 나이나 옐친은 북한을 방문할 때 찍은 사진. 출처. 드미트리 돈스코이/ 리아노보스티로스트로포비치와 보리스 옐친 그리고 러시아 최초 대통령의 아내 나이나 옐친은 북한을 방문할 때 찍은 사진. 출처. 드미트리 돈스코이/ 리아노보스티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되면서 소련 당국은 로스트로포비치에게 귀국을 제안했다. 새로운 러시아에 대해 그는 큰 희망을 품고 있었다. 1991년 8월 소련 보수파가 일으킨 ‘삼일천하’ 쿠데타 기간 중에 그는 경유비자로 모스크바에 들어와 ‘러시아 의회(러시아공화국 의회 의사당)’ 방어에 나서기도 했다. 나중에 그는 볼쇼이극장에 무소르그스키의 ‘호반시나’를 올렸다. ‘호반시나’는 17세기 말 개혁으로 혼란에 빠진 옛루시에 대한 오페라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의 ‘돈키호테’. 출처: Youtube

로스트로포비치는 여러 국제 페스티벌과 콩쿠르를 조직해왔으며 매번 새로운 인재들을 발굴해 세상에 선보였다. 오늘날 전세계에 유명한 많은 첼리스트들이 바로 로스트로포비치가 발굴한 인재들이다. 그중에는 1980년부터 그에게 사사한 후 스승과 함께 도쿄, 소피야, 볼로냐에서 순회 공연을 한 한국인 첼리스트 조영창이 있다. 조영창은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1년에 5~6번 만나서 3~4시간씩 개인 지도를 받는 일이 거의 8년쯤 계속됐죠. 7~8시간 기차를 타고 가서 만나는 것쯤은 흔했어요. 스승님은 말씀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었어요. 연주를 듣고 나면 제가 했던 해석과 다른 관점의 질문을 던져 놓고 다음에 만날 때까지 스스로 답을 찾게 하셨죠.”

하지만 그가 발굴한 음악가 중 가장 놀라운 발견은 당시 12세의 장한나였다. 그녀는 현재 한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첼로 연주자이자 지휘자 중 한 명이다.

후에 한 기자회견에서 로스트로포비치는 장한나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1994년 콩쿠르에서 한국에서 온 12세 소녀가 우승했다. 그녀의 금메달 수상은 정말 기적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다! 보통 콩쿠르에는 나이 제한이 있고 상한선은 32세였다. 그런데 내가 하한선을 정하는 것을 잊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장한나는 정말 기적같다! 물론 그녀가 다른 길로 빠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녀의 연주는 정말 대단하다!”

그밖에도 그는 아픈 아이들을 돕기 위한 자선재단도 조직했다. 기금 모집을 위해 그는 여러 대통령과 기업인들을 만났다. 그런가 하면 그에게는 상처받기 쉬운 연약한 면도 있었다. 한 때 수 년 동안 러시아에서의 연주를 고사한 것은 그에 대한 모욕적인 평론에 상처받았기 때문이었다. 오늘날까지 전 세계가 성을 떼고 ‘슬라바’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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