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카테리나 여제가 대제로 불린 이유

예카테리나 2세

예카테리나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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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여성 통치자 중에서 가장 유명한 예카테리나 2세는 220년 전 11월 17일에 사망했다. 세계 정복, 볼테르와의 서신 교환, 수 많은 총신… 동시대인과 후손들은 여제를 어떻게 기억했는지 Russia포커스가 돌아봤다.

소피야 아브구스타 프레데리카 안갈트-체릅스트카야라는 여자 아기가 1729년 5월 2일 오늘날 폴란드의 셰틴 땅인 프로이센 시테틴에 살던 독일 소공작 가운데 한 명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정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미래의 황제 표트르 3세와 약혼하면서 예카테리나로 변신했다.

권력욕과 계몽 절대주의

예카테리나 2세. 사진제공: Legion-Media예카테리나 2세. 사진제공: Legion-Media

1761년 시작된 표트르 3세의 통치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친 프로이센 정책을 펼쳤고, 젊은 시절 겸손하고 매력적이었던 아내와 달리 귀족 엘리트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다. 1762년 친위대가 예카테리나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표트르는 체포되어 곧바로 ‘사실상’ 살해됐다. 표트르의 사망이 아내의 지시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해도 건강하던 사람이 돌연 대장과 관련된 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아내가 연루됐다는 의심이 제기됐다. 심지어는 독살설까지 떠돌았다. 아무튼 예카테리나는 “우리의 모든 충직한 신하들의 분명하고 진심 어린 뜻”을 인용하며 스스로 권좌에 올랐다.

“그녀는 평생 권력욕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권력을 잡고 나서는 모든 수단을 다해 권력을 유지하려고 했다.” 역사학자 알렉산드르 오를로프는 예카테니라에 관해 이렇게 썼다. 권좌에 오른 젊은 여제는 모든 권력을 자신의 손에 거머쥐었다. 원로원의 입법권을 폐지하며 원로원 개혁을 단행했고 교회에서 토지와 농노를 몰수하며 교회의 경제력을 박탈했다.

하지만 예카테리나 2세는 폭군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다. 18세기의 다른 유럽 군주들처럼 그녀도 군주 혼자 통치하지만, 국민으로 이름으로 또 국민의 복리를 위해 통치한다는 계몽 절대주의 개념에 헌신했다. 그러나 그런 계몽 사상은 태반인 농민이 아니라 귀족에게만 향했을 뿐이다.

귀족들에게는 황금기, 농민들에게는 암흑기

예카테리나 여제의 최대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는 1767년 입법회의(18세기 러시아의 임시 단체 조직들)의 소집이었다. 입법회의는 사회 각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새로운 포괄적 법전을 편찬할 계획이었다. 심지어는 농노제 폐지도 논의됐다. 하지만 결국 입법회의는 해산될 수 밖에 없었다. 오를로프의 지적에 따르면, 입법회의는 불만을 품은 귀족들이 여제에 반기를 들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해산됐다.

예카테리나의 통치는 ‘러시아 귀족의 황금기’로 불린다. 귀족들은 군 복무와 납세에서 면제됐고 자체 공장을 열고 교역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이들은 최대 특권 계층으로서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러시아의 군사정치 엘리트를 구성했으며 광대한 영지에서 화려한 무도회를 열며 여가를 즐겼다.

국민 대다수를 차지한 농민은 예카테리나 2세 통치기에 자유의 잔재조차 누리지 못했다. 지주들은 농민을 유형 보낼 수 있었으며 농민은 지주에 대한 불평이 금지되어 있었다. 농민에 대한 부당한 대우가 절정에 다다르자 그로 인해 1770년대에는 러시아 전역이 농민 반란에 휩싸였다. 그중에서 최대 규모의 반란은 예멜리얀 푸가초프(1773-1775)의 반란이었다. 하지만 반란은 모두 진압됐다.

군사적 성공

예카테리나 예제는 러시아 국내에서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유럽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했다. 그녀는 러시아 통치자로서는 처음으로 크림을 터키에게서 빼앗아 러시아에 편입시켰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의 폴란드 분할 이후 러시아는 오늘날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리투아니아, 라트비아까지 영토를 확장시켰다.

예카테리나가 거둔 승리에서는 그녀의 빛나는 군사령관들이 큰 역할을 수행했다. 러시아 역사상 최고의 장군 가운데 한 명인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여제의 총신 가운데 한 명으로 러시아군을 유럽식으로 개혁한 그리고리 포툠킨이 바로 그들이었다.

과학과 예술의 융성

예카테리나 2세. 사진제공: Getty Images예카테리나 2세. 사진제공: Getty Images

현재 세계 최대 박물관 가운데 하나인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화려한 회화와 그래픽, 조각 작품들은 바로 예카테리나 여제 통치기에 수집됐으며 유럽 최고의 건축가들도 바로 그녀의 초청을 받고 와서 페테르부르크의 유명한 궁전과 교회들을 세웠다. 예카테리나 여제 통치기에는 학교 시스템도 수립됐으며 러시아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 ‘스몰니’가 문을 열었다.

여제 자신도 활발한 창작 활동을 펼쳤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이 게재된 풍자 잡지 ‘잡동사니’를 간행했고 훈계적인 희곡들도 집필했으며 볼테르, 디드로 등 프랑스 계몽철학자들과 서신을 주고 받았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볼테르에 관해 “바로 그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저작들이 나의 이성과 신념을 형성했다”고 말했다. 한편, 볼테르는 예카테리나 여제에게 깊은 존경을 담아 화답했고 유럽에서 여제의 홍보대사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총신 교체

크림반도에 있는 예카테리나 2세 기념비. 사진제공: 세르게이 퍄타코프/ 리아노보스티크림반도에 있는 예카테리나 2세 기념비. 사진제공: 세르게이 퍄타코프/ 리아노보스티

여제의 믿기 힘든 타락상에 관한 전설들이 꾸며낸 이야기에 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제는 특히  실제로 총신들을 자주 갈아치웠다. 예를 들어 역사학자 표트르 바르테네프애 따르면 여제의 평생동안 총신은 23명이었다. 이들은 사실상 가장 가까운 남성들이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가까운 관계도 아니었다. 그런 모호한 관계는 전설의 온상으로써는 안성맞춤이었다.

예카테리나의 총신들은 궁정에서 큰 영향력을 누렸고 값비싼 선물들과 궁전, 토지를 받았고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하지만 이것은 무조건 그런 것만은 아니었고 공과에 따라 이뤄졌다.

예카테리나 여제와 그녀의 마지막 총신이 관계를 맺기 시작했을 때 총신의 나이는 22세였고 여제는 60세였다. 이들의 관계는 1796년 여제의 서거와 함께 중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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