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大)한 푸시킨... 그 열 가지 이유

The Lyceum in Tsarskoye Selo, 1831

The Lyceum in Tsarskoye Selo, 1831

Vostock-Photo
러시아의 6월 6일은 위대한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생일이자 러시아어의 날이다. 아직도 푸시킨을 잘 모르는 이들을 위해 그가 왜 위대한 시인인지, 그리고 러시아인들이 왜 그를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생각하는 지를 설명하는 기사를 Russia포커스가 준비했다.

1. 현대 러시아어의 창시자

흔히들 푸시킨(1799~1837)을 현대 러시아어의 창시자라 부른다. 황제에 바치는 송시(頌詩)에 사용되던 고전주의 규범을 타파하고 미사여구로 가득찬 과장된 문어(文語)와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구어(口語)의 경계를 극복한 것이 바로 푸시킨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들은 러시아인들이 지금까지 쓰고 말하는 언어로 쓰여졌다. 

2. 다양한 장르의 개척자

그의 창작 장르는 놀랄만큼 범위가 방대하다. 푸시킨은 고전주의 송시는 물론이고 낭만주의 시, 연애와 세속을 다룬 서정시, 운문소설, 역사소설, 사실주의 산문, 중편, 단편, 동화, 여행기를 남겼다. 물론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3. 짧은 생애에 ‘모든 것’을 써낸 작가

그는 ‘작은 인간’의 고통,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비범한 주인공, 개인의 행복과 의무 사이에서 선택의 괴로움, 체제에 대항하는 소수의 반란 등 19세기는 물론이고 20세기에 와서도 많은 작가들이 고심하던 중심적 주제들을 작품 속에서 다루었다. 푸시킨이 처음 다룬 이러한 주제들은 이후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체호프, 부닌과 같은 다른 위대한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속에서 재등장한다. 

4. 러시아적 삶의 백과사전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은 푸시킨의 대표작 중 하나다. 19세기 중반 ‘러시아적 삶의 백과사전’이라는 별칭이 붙었을만큼 이 작품 속에는 그 시대 러시아인의 삶과 문화 전반이 고스란히 묘사되어 있다.

‘예브게니 오네긴’은 전 세계 곳곳에서 오페라, 발레, 연극으로 제작·상연되고 있으며 덕분에 그 명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푸시킨이 9년(1823~1831)에 걸쳐 집필한 이 작품은 작가 자신과 시대의 변화상을 반영하면서 여러 차례 고쳐 쓰여졌다.

5. 복잡한 것을 단순하기 말하기

외견상의 단순함은 푸시킨의 작품이 대중적 인기를 누린 또 다른 이유다. 작가에 의해 세심하게 선택된 간명한 표현들은 마치 단숨에 써내려간 것같은 인상을 준다. 하지만 푸시킨의 초고를 보면 그가 얼마나 작품의 한 줄 한 줄을 위해 고심했는지를 알 수 있다. 불과 몇 개의 단어로 마치 눈앞에 보는 것같은 또렷한 인상을 독자의 머릿속에 각인시켜주는 능력이 그에게는 있었다.

출처 : Wikipedia.org출처 : Wikipedia.org

6. 대담한 익살꾼

사후에 푸시킨은 러시아 문학에서 아주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게 됐지만, 생전에 그는 진지한 작가라든가 예언자의 이미지와는 아주 거리가 멀었다. 섬세하고 세련된 유머감각의 소유자였던 푸시킨은 자신의 사행시에 비속어를 즐겨 사용했으며 고관대작들을 겨냥한 독설이 담긴 풍자시를 쓰기도 했다. 그로 인해 결투신청을 받기도 했고 당국과 트러블도 잦았다.

7. 진리를 추구하는 고행자

푸시킨은 ‘자유의 찬가’(ода “Вольность”)라는 시 때문에 몇 년 간 유형생활을 했다. 이 시에는 “사악한 독재자여,/너와 너의 왕좌를 증오한다./너의 파멸, 네 아이들의 죽음을/잔인한 미소로 나는 본다”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이 시를 읽고 격노한 알렉산드르 1세는 시인을 러시아 남부지방으로 유배시켰다가 나중에 시인의 영지인 미하일롭스코예(프스코프 주) 가택연금형에 처한다. 푸시킨은 데카브리스트들(1825년 12월 헌법과 시민의 자유를 요구하며 봉기를 일으킨 귀족 혁명가들)과도 친분이 있었다. 만약 유배 중이지 않았다면 1825년 12월 페테르부르크에서 일어난 데카브리스트의 난(亂)에도 참가했을 지 모를 일이다. 푸시킨은 차르제 전복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는 개인의 자유와 사생활의 보장을 원했고 당국의 검열에 맞서 싸웠다. 그는 러시아인이 끝없이 추구해온 지향점을 이렇게 정의했다. “세상에 행복이란 없다. 하지만 평안과 자유는 있다(На свете счастья нет, но есть покой и воля).”

8. 러시아 ‘돈주앙’이 남긴 아름다운 연애시

푸시킨은 여성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며 사랑해마지 않았다. 그에게는‘돈주앙’이라는 별호가 따라다녔는데, 러시아 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연애시도 그의 작품이다.      

Я вас любил: любовь ещё, быть может,
В душе моей угасла не совсем;
Но пусть она вас больше не тревожит;
Я не хочу печалить вас ничем.
Я вас любил безмолвно, безнадежно,
То робостью, то ревностью томим;
Я вас любил так искренно, так нежно,
Как дай вам Бог любимой быть другим.
1829

당신을 사랑했소. 어쩌면 사랑은
내 가슴속에서 아직 완전히 꺼지지 않았을지 모르오.
허나 당신이 그때문에 근심치 않기를.
무엇으로도 당신을 슬프게 하고 싶지 않소.
당신을 사랑했소. 말없이, 기대 없이,
때론 소심하게, 때론 질투로 괴로워하면서.
당신을 사랑했소. 진심으로, 상냥하게,
당신이 다른 남자의 사랑을 받기를 바랄 정도로.
1829

그런가 하면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에서 푸시킨은 러시아 ‘작업남’들을 위한 제1수칙을 이렇게 정의하기도 했다. “무관심하게 굴수록, 여자들은 더 안달한다(Чем меньше женщину мы любим, тем легче нравимся мы ей).”

9. 위대한 작가들의 논쟁의 대상이 된 작가

많은 작가들이 푸시킨의 위대함을 인정했다. 도스토옙스키는 1880년에 열린 러시아문학애호가협회 회의에서 푸시킨의 재능을 칭송하는 장문의 연설을 했다. 그 연설의 한 대목은 이렇다. “세계에 대한 공감능력, 타민족의 천재로 완벽하게 변신하는 능력, 거의 완전한 변신 능력이야말로 푸시킨을 특징짓는 대표적인 예술적 천재성이자 다른 어느 곳, 다른 누구에게서도 발견할 수 없는 재능이다.” 그런가 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작가 이반 투르게네프는 모스크바 푸시킨 동상 제막식 연설에서 “푸시킨의 시에는 러시아 민족의 특성과 본질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10. 소련인들의 숭배의 대상

구소련 시절 푸시킨은 숭배의 대상이 됐다. 전국의 시콜라 문학수업 교실은 물론이고 집집마다 프토피닌이나 키프렌스키가 그린 푸시킨의 초상화 복제판이 걸려있을 정도였다. 1937년에 이미 푸시킨 서거 백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거행됐고, 이후 탄생 150주년 기념식도 전국에서 치러졌다. 푸시킨 기념일에 맞춰 ‘푸시킨 기념’ 담배, 성냥, 우표, 식기, 비누, 향수 등 그의 얼굴이 그려진 다양한 상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소련 시절 푸시킨은 국가적 상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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