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세계’에 매료된 러시아 물리학자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책

"세상에서 가장 작은 책. 2016년 작. 페이지 크기: 70X90μm"

"세상에서 가장 작은 책. 2016년 작. 페이지 크기: 70X90μm"

블라디미르 아니스킨
양귀비 씨 절단면에 올린 책과 갈기털 속의 장미 등 기네스북에 등재된 미니어처 작품의 세계를 만나 보자.

이 책은 읽기 위한 책이 아니다. 맨눈으로는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노보시비르스크(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3,300km 거리)에 사는 블라디미르 아니스킨의 작품은 현재 기네스에 ‘세계에서 가장 작은 브로슈어’로 올라 있는 일본 장인들이 만든 미니어처북의 88분의 1 크기다.  일본에서 만든 것은 달랑 한 권만 존재하는 유일본이지만, 시베리아의 아니스킨은 1, 2권짜리 두 권을 동시에 만들었고, 앞으로 열 부씩을 더 제작할 계획이다. “자고로 책이란 출판부수도 중요하니까”라고 아니스킨은 그 이유를 밝혔다.

미니어처북 제작 기술

“적합한 기술을 찾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바로 이 과정에 몇 년을 소요했다. 글자와 쪽 크기의 알맞은 비율, 글자 입히기, 제본의 방법을 찾아내는 것은 매우 지난한 과정이며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 책장은 얇은 물감 층에 테토론(합성섬유의 일종) 막을 붙인 이중층으로 되어 있다.  그 위에 15미크론(μm) 두께의 금속글자를 전사기법을 이용해 분사시켰다. 옆에 낸 두 개의 구멍에 알파벳 U자 모양의 스프링을 끼워 책장을 넘길 수 있게 했다. 스프링에 책장을 끼우는 것이 가장 힘든 작업이었다. 두 손으로 세 개의 부속품을 동시에 작업해야 했기 때문이다. 스프링 크기가 너무 작아 핀셋을 사용할 수도 없었다.” 초소형 책을 만든 블라디미르 아니스킨이 말했다.

아니스킨이 만든 책 1, 2권은 각각 여섯 쪽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각 권을 작은 황금판 위에 올리고 그것을 다시 양귀비 씨 절단면 위에 올려 놓았는데, 이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정교한 작업에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제작 자체에는 수 개월이 걸렸지만, 적합한 기술을 찾는데만 거의 5년이 걸렸다고 아니스킨은 말했다.

“다른 일들로 바빴다기 보다는, 이와 같이 극도로 미세한 작업을 하기 위한 정신적 준비가 힘들었다. 무엇보다 감정적으로 평온하고 무념무상인 상태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뭔가에 신경이 쓰이고 걱정이 있으면 미니어처 작업을 시작하지 않는 게 낫다. 그런 상태에선 결코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없다”고 그는 말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주문제작’을 하지 않는다. 마감 기한에 쫓기는 ‘일’ 대신에 그는 취미 생활을 택했다.

과학자의 취미

아니스킨의 직업은 과학자다.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지부 산하 이론실용역학연구소에서 액체와 기체의 미세흐름과 마이크로 수준의 열복사 현상을 연구하고 있다. 미니어처 제작이라는 취미도 실은 자신의 연구과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98년 그는 시베리아의 명문 노보시비르스크대학 졸업반으로 도서관에서 논문 준비에 한창이었다. 그때 세계의 유명한 미니어처작품 제작가들과 그들의 작업에 대한 책을 우연히 막닥뜨렸고 큰 인상을 받았다.

호두 껍데기로 만든 체스판의 높이는 2mm에 불과하다. 출처 : 블라디미르 아니스킨호두 껍데기로 만든 체스판의 높이는 2mm에 불과하다. 출처 : 블라디미르 아니스킨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고, 그때 만난 취미는 평생을 가게 됐다. 지금 이 노보시비르스크 출신 과학자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미니어처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다양한 러시아 훈장 미니어처, 양귀비 씨 절단면 속 러시아 인기 만화 주인공들, 우주선 등 놀라운 작품들이 그것이다. 초기 유명작으로는 상감기법을 이용한 체스판과 말이 있다. 호두 껍데기로 만든 체스판의 높이는 2mm에 불과하다. 머리카락 속 장미와 같은 정교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작품도 있다. 이 작품은 우크라이나의 미니어처 제작가 니콜라이 샤드리스티의 아이디어를 차용한 것으로, 아니스킨은 그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작품 재현 허락을 구했다.

“할 수만 있으면 물론 해도 된다”는 것이 샤드리스티의 대답이었다. 아니스킨은 그 도발을 받아들여 3년 동안 기술을 개발했고 마침내 말의 갈기털 속에 미니어처 장미를 넣는 데 성공했다. 현재 아나스킨의 컬렉션에는 이와 비슷한 다른 작품들이 있다. 장미 한 송이가 아니라 낙타 카라반 행렬 전체를 털 속에 넣은 것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경이로운 작품들도 그의 새로운 미니어처북에 비하면 그 기술의 정교함에서 뒤처진다. 미니어처북 1권과 2권은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1권에는 러시아 알파벳이, 2권에는 말 그대로 벼룩에 편자를 박는 데 성공한 세 명의 장인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가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소설 ‘왼손잡이’에 묘사된 재능있는 장인, 러시아 문학의 전통적 주제인 그것을 미니어처 작품으로 승화하는데 성공한 것은 2002년이었다. 그 외에도 두 명의 제작자가 이 작업에 성공했다.

전 세계적으로 미어어처 장인의 수는 열 명을 넘지 않고 그 대부분이 러시아에 살고 있다. 하지만 영국, 카자흐스탄, 아르메니아, 대만 출신 장인들도 있다. 현재 아니스킨은 움직이는 미니어처 작품을 계획하고 있다. 그는 움직이는 미니어처 작품 제작에 대한 아이디어를 이미 갖고 있지만, 비밀에 부치고 있다. 그는 그것 말고도 원대한 목표를 세웠다. 세계에서 손으로 만들 수 있는 가장 작은 작품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앞으로 그가 세울 기록이 많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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