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공간 속의 ‘검은 사각형’

(사진제공=유리 소모프/리아 노보스티)

(사진제공=유리 소모프/리아 노보스티)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전설적인 그림 ‘검은 사각형’이 올여름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다. ‘검은 사각형’은 한 세기 내내 ‘아방가르드의 아이콘’ 반열에 올라 있었고 전 세계 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모두를 위한 그림이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그림

1915년 12월 페트로그라드(러-독 전쟁 발발 당시 페테르부르크 이름)에서는 '마지막 미래파 그림 전시회' '0.10'이 열렸다. 바로 여기서 관객들은 카지미르 말레비치가 창안한 절대주의 정신을 담은 작품들을 처음 보았다. 말레비치의 동료 화가들은 최고의 희열을 느꼈지만, 관객들은 싸늘한 반응을 보였던 작품은 정교회 전통에 따라 일반적으로 집 안에 성상화를 놓아 두는 곳인 이른바 '아름다운 구석'에 당당하게 내걸린 '검은 사각형'이었다. 하지만 '검은 사각형' 탄생 100주년은 겨울이 아닌 여름에 기념한다. 말레비치 전문가로 유명한 러시아 미술평론가 알렉산드르 샤츠키흐는 '검은 사각형'이 1915년 6월 21에 탄생한 것으로 평가했다.

이름이 바뀐 '검은 사각형'과 절대주의는 처음에 말레비치의 일부 동료 화가와 제자들 사이에서만 숭배됐다. 유럽 내 말레비치 신봉자들은 극소수였다. 러시아와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등 일부 국가에서 비구상화에 대한 관심이 거의 동시에 폭발했다가 나중에 그만큼 거의 동시에(그 이유는 각기 달랐다) 식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카지미르 말레비치가 국제 미술계에서 관심의 변방에 꽤 오래 머물러 있었던 이유를 설명하기는 어렵지 않다. 소련 박물관들에 보관된 그의 작품들이 1930년대 초부터 일반에게 전시되지 못한 상황도 말레비치의 세계적인 유명세를 방해했다. 얼마 전 융성했던 아방가르드에 대한 기억은 철저하게 소련 안에만 머물러 '철의 장막' 너머로의 '수출' 길이 가로막혔다.

검은 사각형 (사진제공=Wikipedia.org)
'검은 사각형' (사진제공=Wikipedia.org)

충격 이후의 전율

그의 사후이기는 했어도 어쨌든 말레비치는 세계적인 유명세를 타게 됐다. 이러한 과정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과 미국에서 추상화 붐이 새로 일어난 상황에서 시작됐다.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작품 몇 점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뉴욕 현대미술박물관에 보관돼 있었으며 유럽에서도 개인 소장자들이 그의 그림 일부를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말레비치의 유산에 대한 관심은 1957년 암스테르담의 스테델리크 박물관이 마침내 탐내던 컬렉션을 입수한 이후에 진정으로 폭발했다. 이 컬럭션은 이상한 소유권에 따라 30년간 독일에 묶여 있었고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말레비치는 이 작품 컬렉션을 1927년 베를린의 개인 전시회에 가져왔다가 전시 작품들을 독일 건축가 후고 헤링에게 보관해 달라고 하고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소련으로 조기 귀국해야만 했다. 말레비치는 이 작품들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이후 말레비치의 작품들은 나치의 눈도 피하고 전쟁에서도 살아 남아 마침내 네덜란드 박물관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작품들은 폭넓게 전시되고 화집으로 출판되면서 상상할 수 없는 결과를 낳았다.

페테르부르크의 미술평론가이자 러시아 아방가르드 전문가인 이리나 카라시크는 "세계 미술사에서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보다 더 큰 명성을 얻은 그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다른 많은 작품의 등장에 이 그림만큼 영향을 끼친 작품은 없다"고 말했다. 이러한 영향은 굉장히 다양하게, 때로는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나타났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영향은 서방에서보다는 러시아에서 덜 느껴졌다.

영원한 사각형

말레비치가 "살아 있는 황실의 아기"로 규정한 '검은 사각형'은 형태보다는 의미들로 효력을 발휘해야만 했다. "나는 형식의 제로로 탈바꿈했고 제로를 넘어 창작으로 나갔다"는 말이 그런 핵심 의미 가운데 하나였다. 달리 말하자면, '검은 사각형'은 낡은 예술의 '병폐'를 피하게 해주는 만능 수단이다. 말레비치의 미학을 곧이곧대로 따를 생각이 없었던 많은 예술가들이 '검은 사각형'을 바로 이렇게 인식했다. 1950~60년대 미국의 미니멀리즘 화가 칼 안드레(Carl Andre)와 도널드 저드(Donald Judd)가 절대주의 양식을 많이 차용했다고 한다면, 프랑스 행위화가 이브 클라인(Yves Klein)이나 미국 화가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작품들에는 말레비치의 진공 기하학을 떠올릴 만한 것이 거의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화가(이들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는 러시아 추상화가 말레비치가 중요한 기준점이었다고 말했다.

독일 개혁가-화가 요제프 보이스(Joseph Beuys)는 한 선언문에서 "모든 것이 예술이다"고 밝혔다. 물론 이 점에서 그는 말레비치의 말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조형적 무절제'에 대한 절대주의자들의 선언적 거부는 개념주의의 탄생을 알리는 서곡으로 간주할 수 있다. '네오-지오'라는 이름의 20세기 말 미국 미술운동 작품들은 '검은 사각형'과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그와 같은 계통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디자인과 건축 같은 분야들에서도 '아방가르드의 성상화'가 끼친 영향의 흔적이 수십 년간 이어져 오고 있는데, '검은 사각형'이 이들 분야에 끼친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그중에서 한 사람만이라도 예로 들자면, 이라크 출신의 유명한 영국 건축가 자하 하디드(Zaha Hadid) 여사는 말레비치의 미술에 매료돼 있었다고 여러 차례 인정한 바 있다. 그녀의 에르미타시 박물관 개인 전시회에서 '사각형' 변주작 가운데 하나가 전시회 제사(題辭)로 등장한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This website uses cookies. Click here to find out more.

Accept cook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