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자유인”... 카자크!

쿠반 카자크. 19세기 말 사진. (사진제공=리아 노보스티)

쿠반 카자크. 19세기 말 사진. (사진제공=리아 노보스티)

카자크들은 시베리아를 개척했고 러시아 국경을 보호했다. 러시아 황제들에 봉사했는가 하면 그들에 반기를 들기도 했다. 유럽인들은 “카자크가 잡으러 온다”는 말로 아이들을 놀래켰고 나폴레옹 휘하 원수들은 카자크들의 전투 기술에 탄복했다. 러시아 역사에서 그야말로 독보적 현상이었던 혁명 이전 카자크에 관한 이야기를 Russia포커스가 정리해 보았다.
역사 속의 카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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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크의 '기원년도'를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카자크의 역사는 그들이 이런 이름으로 사료들에서 자주 언급되기 시작한 15세기로 거슬러올라간다.

루시(고대 러시아) 전역에서 활동적이고 정력적인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봉건영주들의 억압을 피해서, 또 기아와 가뭄, 질병, 구교도 박해, 기타 재난들로 인해서 거의 '무주공산'이나 다름 없던 동유럽 초원의 불안한 경계지대, 다시 말해 드네프르, 돈, 테레크, 볼가, 우랄 강 저지대로 더 나은 운명을 찾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카자크'라는 말은 투르크어족에서 '자유인, 모험가, 방랑자'를 뜻한다. 현대 카자흐 민족의 명칭도 이 어원에서 유래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 큰 강들의 연안을 따라 카자크 자치 공동체 수천 개가 형성됐는데, 이들은 이웃 국가와 부족들과 늘 전쟁을 벌였다. 카자크들은 모든 이웃(모스크바 공국, 크림 한국(汗國), 터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맞서 싸웠으나 필요한 경우 옛 적들과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기도 했다. 카자크들은 수많은 무역로를 통제하면서 자신들의 영토를 통과하는 대상들에게서 통행세를 거둬들였지만, 그들을 그냥 약탈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오늘날 카자크의 이미지는 말과 긴밀히 연관돼 있지만, 카자크들이 본래부터 모두 기마병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카자크 보병은 최근까지도 남아 있었다.

카자크들은 과연 어떤 혈통이었을까? 현대 연구자들은 카자크들의 민족 유전자 안에 분명히 존재하는 러시아와 동슬라브족 요소 외에 투르크계와 캅카스계 민족 요소도 첨가됐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에도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의 카자크 후손들을 자주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카자크들은 특별한 단어들을 제외하고 러시아 내 다른 주민들도 이해할 수 있는 러시아어 방언들로 서로 말했고 또 말하고 있다. 카자크들은 특별한 민족 정체성을 가진 적이 전혀 없지만, 계급 정체성과 종교(정교회) 정체성만큼은 분명하게 표출했다.

오늘날 카자크들은 자신들이 러시아인, 그것도 특별한 부류의 러시아인이라고 생각한다. 전문가들은 이런 경우를 가리켜 '준-민족(sub-ethnos)'이라고 말한다.

역사적 결과 카자크들이 강성해진 모스크바 공국과 그 이후 러시아 제국의 보호 아래 처음부터 신하로 들어가게 된 것도 정교 정체성 때문이었다. 카자크 영토들에서는 카자크 특유의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는 자체의 내부 법이 지배했다. 카자크들은 오로지 군사 원정 때만 자신들 사이에서 지휘관을 선출했을 뿐 나머지 시간에는 모든 카자크가 평등했다.

‘터키 술탄에게 편지를 쓰는 자포로지예 카자크들(Запорожцы пишут письмо турецкому султану)’. 일리야 레핀 작 (1880~1891). 국립러시아박물관, 상트페테르부르크.
'터키 술탄에게 편지를 쓰는 자포로지예 카자크들(Запорожцы пишут письмо турецкому султану)'. 일리야 레핀 작 (1880~1891). 국립러시아박물관, 상트페테르부르크.

당시 유럽 여행자들은 16~18세기 드네프르 강 유역의 카자크 ‘국가’—자포로지예 세치(Запорожская Сечь)—를 가리켜 ‘기독교 공화국’이라고 불렀고 여기에서 기사단들과 비슷한 점을 많이 발견했다.

그러나 17~18세기 차르 정권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카자크 '무법자들'을 억압하려고 하면서 이들을 계속 압박했지만, 이는 당연히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카자크 아타만(수령)들은 수천 명의 농민 대중을 선동해 모스크바에 맞서 수차례 봉기를 일으켰다. 먼저 1670~71년에는 스테판 라진(Степан Разин)이 차리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Алексей Михайлович)에 맞서 대규모 봉기를 이끌었다. 그다음에는 콘드라티 불라빈(Кондратий Булавин)이 표트르 대제에 맞서 봉기했고, 예멜리얀 푸가초프(Емельян Пугачёв)는 예카테리나 여제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다. 한편, 자포로지예 세치는 바로 자신들의 옹고집 때문에 18세기에 해체됐다. 예카테리나 여제에 충성한 카자크들은 쿠반(북캅카스)으로 이주했지만, 자포로지예 카자크 중 일부는 오스만 왕국 영토로 이주하여 자두나이 세치(Задунайская Сечь)를 형성해 터키 술탄에 충성했으며, 일부 카자크는 심지어 보예보디나까지 가서 오스트리아와 터키 국경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에 봉사했다.

동풍

카자크들은 러시아 상인과 제조업자, 군인들과 함께 오늘날의 카자흐스탄 영토를 정복하는 데도 크게 이바지했다. 카자흐스탄 서부 대도시 우랄스크는 물론이고 혁명 전까지 베르니(Верный)로 불렸던 카자흐스탄의 옛 수도 알마-아타도 카자크들이 세웠다.

이처럼 복잡한 관계였지만, 카자크들과의 평화 시기에 차리 정권은 국가의 영토 확장을 위해 이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우랄과 시베리아, 극동을 정복하고 동화하며 러시아 제국을 형성하는 데서 카자크들이 담당한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랄과 시베리아, 극동의 많은 현대 도시가 다름 아닌 카자크들에 의해 건설되었다. 이르쿠츠크, 하바롭스크, 옴스크, 톰스크, 야쿠츠크, 블라고베셴스크, 페트로파블롭스크캄차츠키, 오렌부르크, 크라스노야르스크, 크라스노다르, 심지어 그로즈니까지 오늘날 러시아연방의 주와 자치주 수도들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목록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카자크들은 태평양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태평양도 이들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1648년 카자크 세묜 데즈뇨프(Семён Дежнёв)는 이후 러시아의 알래스카 진출을 위해 아시아 쪽 아메리카를 개쳑했다.

‘자포로지예 카자크(Запорожский казак)’. 콘스탄틴 마콥스키 작 (1884)
'자포로지예 카자크(Запорожский казак)'. 콘스탄틴 마콥스키 작 (1884)

오늘날 러시아의 핵심부와 러시아 경제의 토대를 이루는 유라시아의 거대 공간들(석유와 가스, 금, 기타 유용 광물의 주요 매장지가 바로 여기에 집중돼 있다)을 정복한 것은 한편으로는 러시아 황실의 지원과 전략적 계획, 직접 지시에 따른 결과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차리와 권력으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고자 한 카자크 내부의 열망이 낳은 결과였다. 타고난 엄격함 덕분에—실제로 카자크들은 유아기부터 전사로 훈육됐다—카자크들이 토착민과의 관계에서 난폭했고, 종종 잔인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모른 체할 수는 없다.

우랄, 시베리아 또는 극동의 토착 민족 가운데 러시아(원래는 바로 카자크들)의 식민화 과정에서 몰살당한 민족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러시아인과 식민지 토착민 사이에 평화로운 공존의 토대를 마련한 사람들도 바로 카자크들이었다. 세계의 다른 지역들을 정복하며 대량살육을 자행한 서유럽 사람들과 달리 카자크들은 원주민들을 절대 살육하지 않았다.

엘리트 계급

젊은 돈 카자크라면 누구나 자기 가족에게서 말과 창, 검, 소총, 단도, 권총 두 정, 여름과 겨울용 제복 두 벌씩 받아야만 했다.

예멜리얀 푸가초프의 반란을 진압한 이후 차리 정부는 카자크들과 더는 갈등을 빚지 않기로 했다. 카자크들은 마침내 강력한 전사 계급으로 형성되었다. 이제 카자크가 되는 건 불가능했고, 카자크로 태어나야만 했다. 러시아 제국의 국경을 수비하고 군사 원정 참전이 카자크들의 주요 임무였다. 카자크들은 이에 대한 보상으로 황제로부터 막대한 토지와 세금면제, 내적 자치권이라는 특권을 받았는데, 돈 카자크들은 심지어 돈 군관구 자치영토를 받기도 했다. 차리 정부는 카자크들과 갈등을 빚지 않기로 한 덕분에 카자크들의 절대적 지지를 확보했다. 이제 카자크들은 러시아 제국에서 차리에 가장 충성하는 계급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동시에 이들은 (자체)조직력이 굉장히 뛰어났고, 전원 무장에 전투력도 탁월했으며 '차리와 정교 신앙을 위해' 자신들과 타인들의 피를 흘릴 준비가 항상 되어 있었다.

바로 19세기가 카자크의 전성기였다. 아타만 마트베이 플라토프(Матвей Платов)가 이끄는 돈 카자크들은 러시아 승전군과 함께 나폴레옹을 패주시켜 파리에 입성하여 대담무쌍하고 잔인한 천하무적 기병의 새로운 이미지와 '비스트로(бистро, bistro)'('빨리'를 뜻하는 러시아어 부사 '비스트로(быстро)'가 변형된 말로 당시 파리에 입성한 카자크들이 파리 식당에서 음식을 '빨리' 내놓으라고 재촉한 데서 유래했고, 이로부터 '비스트로'라는 이름의 페스트푸드 식당이 생겨났다, 편집자 주)라는 말을 유럽과 전 세계에 선사했다. 니콜라이 1세 치하 러시아 영토(폴란드 내)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1848년에는 헝가리인들이 일으킨 반란으로부터 이웃 합스부르크 제국을 구해주기도 한 사람들이 바로 이들 카자크였다. 여기서 카자크들은 오스트리아 국민, 즉 빈에 충성한 세르비아인들과 한편이었다. 1878년 카자크들은 러시아군과 함께 오스만 터키인들을 무찌르고 발칸 반도의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루마니아인들에게 완전한 자유를 가져다주었다.

또 카자크들은 민중봉기 진압에도 참가했고 러일전쟁과 1차 대전 전선에서도 용감하게 싸웠다. 1918년부터는 자신들의 땅에서 유혈 낭자한 내전의 비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흥미로운 사실 열 가지

  • 나폴레옹과 동맹을 맺은 러시아 황제 파벨 1세는 카자크들을 인도 정복 길에 파견했지만, 이 원정은 황제가 사망하면서 중단되었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그 휘하 원수들은 카자크들의 승마법(말과 함께 움직이는) 그리고 안장 자체(앞뒤 턱이 없이 밋밋한)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 카자크들은 유럽 기병대와 달리 박차 대신 채찍을 이용해 말을 몰았다.
  • 카자크 말들은 지구력과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 옛날 그림들을 보면 카자크들은 언제나 바지에 빨간색 줄무늬를 수놓은 푸른색 제복을 차려입고 창을 치켜들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 테레크와 쿠반 카자크들은 이웃 캅카스 민족들에게서 복장과 춤, 무기 등 아주 많은 특징을 전해받았다.
  • 페르시아의 샤(Shah, 국왕)는 자체 카자크 여단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 부대는 러시아 카자크를 모델로 창설되었고 러시아 출신 장교가 이끌었다.
  • 우랄 지역 첼랴빈스크 주의 한 마을은 1814년 우랄 카자크들의 파리 습격을 기념하여 '파리'로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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