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티야코프 미술관: 러시아 역사 여행

한 연구자가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의 빅토르 바스네초프 전시회에서 ‘주님을 경배하는 신자들. 세폭화’(“Радость праведных о Господе”. Триптих. 1885~1896)의 밑그림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제공=블라디미르 뱟킨/ 리아노보스티)

한 연구자가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의 빅토르 바스네초프 전시회에서 ‘주님을 경배하는 신자들. 세폭화’(“Радость праведных о Господе”. Триптих. 1885~1896)의 밑그림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제공=블라디미르 뱟킨/ 리아노보스티)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은 예술 애호가와 역사 마니아, 그리고 러시아 문화에 관심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가볼 만한 곳이다. 거대한 박물관 안에서 그리고 헌신적인 러시아 아티스트들의 대작 컬렉션 전시회에서 관람객들이 길을 잃는 경우가 다반사다.

바실리 베레샤긴의 섬뜩한 명화 '전쟁의 화신'을 감상하고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않기는 어렵다. 이 그림은 캔버스에 유화로 그려졌으며, 크기는 50x77인치이다. 베레샤긴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 작품이 탄생한 시기는 187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제정 러시아는 영토 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으며, 서쪽의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동쪽의 태평양까지, 남쪽으로는 인도로 들어가는 길목과 맞닿는 곳까지 영토를 넓혀 나가던 중이었다. 모스크바에 있는 국립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은 딱딱한 교과서에서는 배울 수 없는 러시아의 생생한 역사를 보여준다.

바실리 베레샤긴 ‘전쟁의 화신’(“Апофеоз войны”, 1871). (사진제공=국립 트레티야코프 미술관/Wikipedia.org)
바실리 베레샤긴 '전쟁의 화신'("Апофеоз войны", 1871). (사진제공=국립 트레티야코프 미술관/Wikipedia.org)

베레샤긴이 중앙아시아를 여행하던 당시는 제정 러시아가 주변 영토를 하나씩 야금야금 점령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베레샤긴이 걸어간 여행의 발자취는 '티무르의 문'(Двери Тимура, 1872) 등의 작품을 통해서 더듬어 볼 수 있다.

'승리를 만끽하다'(Торжествуют)라는 제목을 단 세로77 가로101인치의 또 하나의 거대한 작품에는 파란 타일로 장식한 사원이 등장한다. 이 사원은 지금도 우즈베키스탄에 남아 있다.. 베레샤긴은 인도를 여행했으며, 인도를 주제로 한 그의 작품은 로에리치 일가의 작품보다 먼저 그려진 것이다.

빅토르 바스네초프의 '세 용사'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이 소장한 또 다른 대형 그림(116x175인치)으로 그림 속에서 강건한 말에 올라탄 세 명의 건장한 기사는 웅장한 느낌을 준다. 러시아의 잔혹한 역사와 다사다난한 과거사 속에서 꽤 많은 러시아 화가가 전쟁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빅토르 바스네초프, ‘세 용사’(Три богатыря, 1898). (사진제공=국립 트레티야코프 미술관/Wikipedia.org)
빅토르 바스네초프, '세 용사'(Три богатыря, 1898). (사진제공=국립 트레티야코프 미술관/Wikipedia.org)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는 상류층의 초상화에서 순례자들의 모습, 평화로운 전원 풍경에 이르기까지 제정 러시아의 생활상을 담은 그림도 일부 소장돼 있다.

바실리 푸키레프 ‘어울리지 않는 결혼’(Неравный брак, 1862). (사진제공=국립 트레티야코프 미술관/Wikipedia.org)
바실리 푸키레프 '어울리지 않는 결혼'(Неравный брак, 1862). (사진제공=국립 트레티야코프 미술관/Wikipedia.org)

1862년 바실리 푸키레프는 60대의 노인이 자기 나이의 절반도 채 되지 않아 보이는 처녀와 결혼 하는 모습을 그린 '어울리지 않는 결혼'이라는 작품을 남겼다. 결혼식은 러시아 정교 교회에서 열리고 있으며, 노인은 당시 상류층으로 보이는 차림을 하고 있다. 푸키레프는 여성의 권리와 물욕에 젖은 사회에 관한 견해를 보여주면서 자기 세대보다 훨씬 더 앞서 나갔다.

일라리온 프랴니시니코프를 비롯한 다른 화가들은 1860년대 시골과 도시의 생활상을 보여준다. 프랴니시니코프의 '빈 썰매'(Порожняки)에는 도스토옙스키가 자주 다룬 소재인 초라한 소작농이 그려져 있는데, 그 모습에 애틋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그림은 추운 겨울 저녁 썰매 위에서 체온을 유지하려 애쓰는 중년 남자의 모습을 담고 있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은 훌륭한 초상화들도 보유하고 있다. 바실리 페로프는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 알렉산드르 오스트롭스키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반 크람스코이는 레프 톨스토이, 미술관 설립자 파벨 트레티야코프 본인과 화가 이반 시시킨의 초상화를 남겼다. 시시킨의 작품도 박물관에서 두드러진다.

매우 정밀해 거의 사진처럼 보이는 작품 중 일부는 19세기의 또 다른 거장 일리야 레핀의 손에서 탄생한 것이다. 소피야 알렉세예브나 공주의 분노에 찬 눈빛이 레핀 작품 전시관에 발을 내딪는 관람객들을 맞는다. 1698년 스트렐치(친위부대원들)의 처형 당시 공주는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감금되었다. 레핀이 그린 분노한 공주의 초상화는 감금된 지 1년 후의 모습이다. 또 다른 걸작에서 레핀은 무고하게 죽음을 맞을 뻔 한 세 사람을 구하는 니콜라이 미를리키스키 성자의 공포에 찬 눈빛을 그렸다. 레핀은 초상화도 그렸는데, 그중에는 레프 톨스토이와 작곡가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의 초상화가 있다. 하지만 레핀은 1891년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쿠르스크 현의 십자가 행렬'(Крестный ход в курской губернии)처럼 실생활의 행사를 소재로 한 웅장한 작품으로 더 유명하다.

미하일 브루벨 ‘악마’(Демон, 1890). (사진제공=국립 트레티야코프 미술관/Wikipedia.org)
미하일 브루벨 '악마'(Демон, 1890). (사진제공=국립 트레티야코프 미술관/Wikipedia.org)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작품은 미하일 브루벨의 '악마'다. 음침하면서도 핸섬하게 생긴 악마의 이미지는 관람객에게서 항상 엇갈리는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 그림과 관련하여 필자가 접한 의견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현재 이탈리아에 활동하고 있는 러시아 미술 교수의 견해다. 그녀는 그림 속의 악마가 슬퍼 보이는 이유가 세상의 모든 무게와 짐을 자신의 어깨에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브루벨의 작품은 러시아 상징주의 운동의 일파로 분류돼 왔다. 하지만 브루벨 자신은 정작 동시대 미술 사조들과 거리를 뒀다. 덕분에 그의 작품은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러시아의 위대한 화가와 작가들은 하나같이 조국의 아름다운 사계절과 장엄한 자연에 각별한 경의를 표했다. 이삭 레비탄의 '황금빛 가을'은 붉은 색이 주종을 이루는 북아메리카의 낙엽과는 달리 황금빛 노란색이 주를 이루는 러시아 가을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고 있다.

이삭 레비탄 ‘황금빛 가을’ (Золотая осень, 1895). (사진제공=국립 트레티야코프 미술관/Wikipedia.org)
이삭 레비탄 '황금빛 가을' (Золотая осень, 1895). (사진제공=국립 트레티야코프 미술관/Wikipedia.org)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은 '무드 풍경화'로 유명한 레비탄의 다른 걸작도 소장하고 있다. 그중에는 여름 저녁 언덕 꼭대기에서 강가의 하얀 정교회 교회를 그린 '저녁, 황금빛 플료스'(Вечер. Золотой плёс)와 같은 작품이 있다. 이 작품처럼 19세기 말 러시아 시골 여름철 삶의 본질과 정신, 소박성을 잘 포착해낸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국립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의 역사는 185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모스크바의 상인 파벨 미하일로비치 트레티야코프는 언젠가 국립 미술관을 만들 수 있도록 미술품을 수집하기로 하고 당대 러시아 화가들의 작품을 사들였다. 트레티야코프는 1892년 2천 여 점에 달하는 자신의 소장품을국가에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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