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속 한국영화

김기덕 감독을 세계적 거장 대접, “한국 영화는 잔인하고 유혈 낭자”

러시아의 '사마리아' 포스터 

2012년 러시아 극장가에서 개봉된 한국영화는 5편이고 그나마 2편은 애니메이션이다. 같은 기간 개봉된 이탈리아 영화가 6편, 중국영화는 1편임을 감안하면 적지는 않다. 러시아에서도 개봉관을 장식하는 영화의 대부분이 할리우드 영화다. 블록버스터급 러시아산 영화가 단기간 극장가를 지배하는 경우도 간혹 있지만, 비할리우드권 영화들은 여전히 비주류로 외면당한다. 이탈리아, 한국, 덴마크 혹은 중국 영화들은 예술영화나 제3세계 영화 전용관에서만 볼 수 있다. 한국에서 1,300만 관객몰이를 한 최동훈 감독의 '도둑들' 정도 대작이라면 러시아 흥행이 되겠지만, 상영권을 사들인 배급사는 뜸을 들이며 개봉날짜를 늦추고 있다.

거기엔 이유가 있다. 러시아에 한국영화가 첫 선을 보인지 13년이 된 지금 관객에게 한국영화는 잔인한 드라마, 섬뜩한 고문 장면이 담긴 호러, 한마디로 '익스트림 엑조티카'라는 고정관념이 들어있다. '도둑들'이 이런 고정관념을 벗어나기 때문에 고정 관객의 외면을 받을 수도 있다는 점을 걱정하는 것이다.

이런 고정관념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2000년 러시아에 처음개봉된 한국의 현대영화는 강제규 감독의 '쉬리'였다. 반응은 한 마디로 실망 그 자체였다. 영화비평가들은 홍콩, 할리우드 액션영화를 베꼈다고 혹평했고, 일반관객들은 영화 내내 한석규와 송강호를 헛갈려 했다. 이어 나온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도 홍콩, 미국, 일본 영화 따라하기에 불과하다는 -완전한 오판이긴 했지만-  당시 러시아 관객들의 인식을 재확인시켰다.  비평가들은 심지어 이명세 감독 스타일을 놓고  'MTV식 개그'라고 단정했으며, 한국영화의 맥락을 이해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명세 감독의 전작이나 박광수 같은 감독의 작품을 접한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한국영화 하면 모두 액션영화나 당시 비디오로 출시된 '주유소 습격사건' 같은 엉뚱하고 이해하기 힘든 코미디를 떠올렸다.

러시아의 '쉬리' 포스터

이런 인식은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 로 바뀌는 계기를 마련했다. 섬세한 추리물인 이 영화는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히치콕스러운 모티브로 충격을 줬다. 그때까지 러시아 관객과 평론가가 보아온  한국영화와 전혀 달랐다. 한국에도 세계적 수준의 작가-감독이 있음을 깨달았다. 박찬욱 감독의 차기작들도 극장에서 개봉되었다. 한국영화가 자막과 함께 상영된  것과 달리 '올드보이' 같은 작품은 흥행을 위해 더빙되기도 했다.

한국영화가 잔인하고 유혈이 낭자하는 괴상망측한 영화라는 명성에 박찬욱 감독의 '복수3부작'과 '박쥐'가 한 몫 했지만, 최대공헌자는 김기덕 감독이다. 2001년 개봉된 김기덕 감독의 첫 작품 '섬'은 러시아 관객과 비평가들을 충격과 경악으로 몰아넣었다. 저수지를 부유하는 집들(수상좌대) 사이를 오가는 잔혹한 욕망의 드라마, 특히 낚시바늘 장면은 비평가와 관객의 상상력에 큰 충격을 주었다. 영화 '섬' 안에서  시, 그리고 사랑, 죽음에 대한 보편적인 진리를 발견한 사람들은 김기덕을 오시마 니기사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같은 세계영화의 거장들과 같은 레벨에 놓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 이듬해 '나쁜 남자'와 '수취인 불명'이 동시 개봉됐으며 다작성향을 보인 감독 덕분에 관객들은 연이어 김기덕 작품들을 접할 수 있었다.

어쩌다 러시아에서 한국영화감독 하면 떠오르는 첫 번째 인물이 김기덕이 됐을까? 김기덕만큼 심오하면서도 덜 잔인한 정통 멜로드라마를 만드는 허진호 감독도 있다. 여기엔 러시아 영화배급시스템의 특성이 한 몫 한다. 배급사들은 대개 베를린 영화제나 칸 영화제 같은 대형 국제영화제와 동시에 열리는 필름마켓에서 사들이게 된다. 배급사들은 영화제 수상작이나 관심작에 손을 먼저 내민다. '쉬리',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주유소 습격사건', 그리고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 같이 러시아 상영 패키지에 포함된 영화들도 2000년 유럽 영화제들에서 소개된 작품들이었다. '공동경비구역'은 베를린 영화제에서 공수됐고, 김기덕 감독의 '섬'은 베니스 영화제를 충격의 도가니로 만든 후 러시아 배급사의 눈에 띄게 됐다.

그후 10여 년이 지났지만 바뀐 것은 없다. 유럽에서 주목 받은 영화들이 러시아에서도 상영된다. 한국영화는 유럽을 거쳐 러시아에 상영되며 '동양의 익스트림' 영화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문화적으로는 몰라도 적어도 지리적으로는 서유럽보다 한국에 더 가까운 데도, 러시아에서 열리는 영화제들에서조차 배급사와 바이어들은 전적으로 유럽의 평가를 기준으로 삼을 뿐 독자적인 시각으로 한국영화를 보지는 못하고 있다(다행히도 블라디보스토크 아시아태평양영화제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러시아의 '피에타' 포스터 

유럽의 주요 영화제의 수상작을 선호하는 러시아 배급사들은 봉준호 감독과 김지운 감독의 수작들을 외면했다. 러시아에서 개봉된 유일한 신세대 감독 영화는 장철수 감독의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이다. 이 영화가 칸 영화제에서 주목 받았기 때문이다. 홍상수 감독의 '하하하'도 2010년 칸 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대상을 받은 후 러시아에서 개봉되었다. 홍상수와 같은 거장도 열 번째 작품으로 러시아극장에 처음 개봉되었다.  '하하하'는 홍상수 감독의 작품 중 가장 코믹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도 반응은 다양했다.  전혀 재미없다는 사람도, 멜랑콜리한 감성을 느꼈다는 사람도 있었는 데, 가장 큰 이유는 언어장벽으로 밝혀졌다. 한국어가 아니라 영어에서 러시아어로 중역되는 과정에서 '하하하'의 코믹한 유머와 대사의 의미 전달이 제대로 이뤄지질 못했다.

한국영화가 DVD로도 많이 출시되긴 하지만 영화비평의 관심권 밖이고 방송사들도 TV 방영권을 사들이는 경우가 드물어 한국영화와 문화의 명성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한다. 영화관은 관객들이 다른 나라의 문화를 만나는 주된 장소다. 극장이나 특별영화제, 회고전 등에서 더 많은 한국영화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한국영화는 뭔가 좀 괴기하고 극단적이라는 러시아 관객들의 편협한 인식에 변화가 오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하루빨리 '도둑들'이 개봉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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